무릇 사라진 것은 그리움을 남긴다. 그러나 사라지는 것이 새로운 창조가 된다면 몰라도 그러지 못하고 파괴가 된다면 그 무참한 상실감을 어찌 하랴. 경주의 성역 반월성에서도 요즘 그런 심정을 느끼는 분들이 있다. 반월성을 복원한다며 거액의 국비를 끌어와 발굴 작업을 하는 것은 환영할 일이기도 하겠으나 다른 한편 걱정이 따른다. 원형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욕심을 앞세워 복원을 서두르는 것은 아닌지 통 미덥지 못해서다.    월정교를 보면 더욱 마음이 그늘진다. 그런 가운데 최근 엉뚱하게 불거진 논란거리가 있다. 반월성터의 나무를 대대적으로 벌목한 일에 관한 논란이다. 물론 베자는 쪽이야 타당한 이유를 들어 그랬다 할 터이나 나무를 베어내기 전에 공청회나 설명회를 열어 의론의 기회를 가졌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나무가 사라진 영문을 알지 못하니 뒤늦게 사람들 마음에 탈이 난다.  베어낸 나무 중에 유독 벚나무가 많았다. 무려 8백여 그루나 된다니 말이다. 어째서 벚나무일까. 거기에는 벚나무 곧 `사꾸라` 일본에서 이식된 외래종이라는 편견도 한 몫 했을 것 같다. 반월성은 신라의 왕경이니 `왜색`을 벗겨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을까. 그러나 식물분류학이 진보하면서 한반도 왕벚나무의 원종이 제주도 토종 왕벚나무라는 설이 점차 정설화 되고 있지 않은가?  우리 경주는 벚나무가 많아 봄철 관광이 성황인데 그 주종은 왕벚나무와 겹벚나무로 근래에 가로수로 심은 것이며 주로 일본에서 수입된 개량종이라는 설이 우세하다.  그렇지만 반월성의 벚나무는 토종 산벚나무였다고 나는 기억한다. 산벚나무는 우리 토종 수목으로 키가 크고 꽃은 4-5월에 흰색 또는 연홍색으로 피며 2-3개가 모여 산형화서를 이룬다. 반월성은 환경이 좋아서 산에서 자라는 산벚나무보다 대체로 수고가 높고 수폭도 크고 직경도 굵었다. 이 산벚나무가 토종이라면 신라 시대부터 숲의 일원으로 반월성의 풍경을 이뤄왔을 터이니 참으로 성급했다.  국어교사로 재직했던 경주고등학교에서는 연례행사로 백일장을 두 차례 거행한다. 선배교사이신 故서영수 시인께서는 이날이면 황룡사지와 반월성으로 학생들을 끌어내 교외 백일장을 개최하시곤 했는데 나 또한 지난 십년사이 퇴임이 가까워져서야 그 속뜻을 헤아리게 됐다. 그래서 봄이 오면 개교기념 백일장을 반월성에서 개최하고자 교실에서 반월성쪽 기미를 살피며 벚꽃 피기에 맞춰 일정을 잡았다.    봄철 행사지로 반월성을 고집한 까닭은 바로 그 감동의 순간 때문이다. 전교학생들을 반월성 한 가운데로 이끌어 놓고서 글제를 주고 자유롭게 글을 쓰게 한다. 그러던 중에 바람이 불자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반월성 북편 비탈에서 부는 상승풍이 벚나무 꽃잎들을 공중으로 떠올렸다가 꽃비를 흩뿌리는 것이었다. 반월성터 전체가 꽃비에 휩쓸리는데 햇살은 그 꽃잎들을 낱낱이 빛나게 하며 학생들의 머리 위에 눈 속에 심지어 마음속까지 내려앉았다. 그날의 내 눈에는 바로 그 정경 자체가 봄날이요 시심이요 예술이었다. 교실 수업에서 도저히 전할 수 없었던 시심. 시적인 아름다움. 그 실체를 이보다 더 잘 전할 수 있는 교재가 또 있을까 싶었다.  그뿐인가 신라인들은 아름다움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으니 반월성의 이 산벚나무가 봄이면 무상으로 주는 지복(至福)의 순간을 즐기며 후세에 길이 전하리라 했겠지 어찌 한낱 땔감을 다퉈 무참히 베어 없애버리랴 싶었다.    돌이켜 보면 경주에 와서 살아온 지가 어언 30년이 넘었고 그동안 개인적으로 이러 저러한 유적과 풍경들을 만났었지만 그 만한 감동을 견줄 데는 다시없었다. 그러나 지난 두 해 동안 이곳에서 800여 그루가 `학살`되고 말았으니 다시 만나볼 길 막막하다. 아아 내 가슴도 깎이고 무너져 내린다. 살아남은 벚나무는 몇 그루나 될까? 그날의 제자들이 경주로 돌아와 "꽃비를 다시 보러 갑시다" 하면 나는 뭐라 말할까. 아하 정녕 누가 내게 반월성 복원의 기획을 맡겨 준다면 꼭 벚나무 꽃잎 흩날리는 봄날을 복원하리라. 하지만 대체 얼마가 걸려야 그 키 큰 산벚나무 거목이 흩날리는 꽃비 속을 다시 걸어볼 수 있을까.    잠이 오지 않는다. 날이 새면 어서 가서 헤아려 봐야겠다. 그루터기를 어루만지며 달래며 곡(哭)이라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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