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호에 이어> 당시 마을에는 5개반(10여호)이 1일씩 교대로 작업을 했으며 본인이 당시 18세로서 직접 마을 어른들과 함께 해동이 될 때까지 굴 파기를 했다. 이렇게 불확실한 상황에서 판 굴을 모두 진짜 신라시대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일부 주민들의 말과 함께 마을 뒷산에 설화 속 굴로 추정해 볼 수 있는 오래된 동굴이 지금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금하굴과 그 주변의 토지(순천김씨 종중) 소유주였던 김두희(金斗熙)박사께서 1997년 문경시장에게 보낸 `견훤유적지 조성사업에 대한 이견`이란 글에서 `금하굴은 견훤유적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금하굴은 1946년 금하굴을 발굴해서 동민의 소득을 올려보겠다고 파다가 실패한 흔적에 불과한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또 전설 속 초립동이 들어간 곳이 굴이 아닌 쏘(아차마을 뒷산에 민지쏘가 있다)라고 한 마을 주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당시 이를 무시하고 인위적으로 조성된 금하굴에 안내판을 세우고 정비를 해 홍보한다고 하니 내용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곳이 금하굴로 잘못 알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후손들에게 거짓을 진실인 것처럼 꾸며서 알리는 것이 되므로 그럴 필요도 없으며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했다.
그런데 이미 문경시가 견훤왕과 관련된 향토 역사를 새롭게 재조명하고자 1996년에는 견훤의 출생과 관련된 전설 및 각종 유적에 대한 학술조사를 실시했고 이를 토대로 견훤유적지에 대한 성역화 사업으로 2002년 6월 숭위전을 건립하고 금하굴 주변을 일제히 정비했다.
그리고 지난해 1월 26일 `견훤대왕 역사유적지` 개발 용역 최종보고회를 개최하고 이 보고서를 견훤대왕 역사유적지 개발 사업 추진 근거자료로 활용, 금하굴 정비와 생가 복원 등을 추진해 관광 자원화 할 계획이라고 했다.
그래서 필자는 앞에서도 기술했듯이 이 사업 추진에 있어 우리 지역 견훤유적지 중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야래자(夜來者) 설화인 `견훤 출생 설화`가 있는 금하굴(金霞窟)과 생가 복원 등에 대해 가능한 한 모든 노력을 기울여 문헌 고증과 현지 등 다양한 조사를 통해 그 실체를 다시 한번 규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미 실시했다는 `학술조사 및 개발용역보고서` 내용을 알 수 없으나 금하굴에 대해 위 이상호 어르신의 진술과 김두희(金斗熙) 박사의 기고문이 사실이라면 문제가 크고 생가 역시 금하굴처럼 아무 근거도 없이 소설 쓰듯 허구를 진실인 양 할 수는 없는 것이고 그래서도 안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정확한 학문적 연구와 역사적 고증 없이 마을 주민도 믿지 못하는 곳에 인위적으로 만든 현 금하굴도 재고돼야 하고 생가터 역시 근거 없이 추측만으로 마치 오래전부터 있었던 역사유적인 것처럼 한다면 후손들과 역사에 부끄러움이 되고 사업 완공 후 찾아오는 학생, 관광객을 기만하는 비교육적인 현장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해 참고 말씀을 드린다면 후삼국은 후백제·후고구려·통일신라 3국을 말하는 것이며 후삼국 시대는 892년 견훤이 무진주(현 광주)를 점령하고 왕을 칭한 때부터 936년 고려가 한반도를 통일하기까지의 시기를 가리킨다.
후백제는 견훤(甄萱 867~936)이 신라 서남 해변을 방비하는 비장(裨將)으로 있다가 진성여왕 때 무진주(武珍州:光州)와 완산주(完山州:全州)를 장악하고 백제 부흥을 명분으로 완산주(전주)를 수도로 삼고 900년 후백제를 세웠다.
견훤은 상주 가은현(加恩縣) 사람으로 농민이었다가 장군이 된 아자개(阿玆蓋)의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