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도시의 중심에는 역이 있었다. 선로가 놓이면 주변에 집들이 들어서고 시장이 섰다. 누군가는 꿈을 이루기 위해 그 역을 통해 도시로 나가고 성공해서 역을 통해 집으로 돌아왔다. 남루한 옷에 빈손으로 돌아와도 고향 역은 어머니 품처럼 따뜻하게 맞이했다. 그래서 기차역은 늘 희망의 상징이 되었다. 학도병1950년 6.25전쟁 발발 열흘쯤 지난 7월 7일 오후 2시. 경주의 중학생들은 가슴에 태극기를 두르고 경주역에 모였다. 역은 경주의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떠나보내는 가족들과 태극기로 발 디딜 틈 없이 큰 물결을 이루었다. 경주 원로 음악가인 안종배 교수는 당시 경주중학교 6학년으로 밴드부 악장을 맡았다. 그도 가슴에 태극기를 두르고 환송 나온 많은 시민들 앞에서 애국가연주에 맞춰 지휘를 했다. 시민들은 목이 터져라 애국가를 불렀고 꽉 쥔 두 주먹 위로 푸른 동맥이 산맥처럼 훤하게 드러났다. 제자들만 보낼 수 없다고 교사들도 자원입대했다. 서라벌 화랑의 후예들은 시민들의 환송을 받으며 기차를 타고 그렇게 전쟁터로 떠났다. 광장경주역 광장에는 봄가을이면 늘 수학여행 온 학생들을 기다리는 관광버스들이 빼곡하게 대기하고 있었다. 열차가 쏟아 놓은 학생들은 버스 앞 유리창에 붙어 있는 표찰을 찾아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줄 세우는 소리, 친구들 부르는 소리, 경적소리. 7, 80년대 경주는 수학여행의 필수코스였다. 왁자지껄했던 광장의 풍경을 이젠 다시는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설레임‘경주역’ 이라고 말을 하면 우리 모두의 가슴에는 아날로그적 설렘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 목월백일장에 참가하기 위해 대구에서 글 좀 쓴다는 친구들과 비둘기호를 탔다. 그때 상을 받지 못했지만 한 참 뒤인 2006년 ‘계단’으로 일반부 장원을 했다. 그리고 경주가 고향인 남편을 만나기 위해 무궁화호를 타고 대구역에서 경주역까지 가는 동안의 1시간은 늘 가슴이 콩닥거렸다. 기적소리1990년에 결혼을 해서 신혼살림을 시댁에서 시작했다. 시댁은 경주역 뒤에 있는 일본식 집으로 철도가 개통될 당시 역관사로 사용되던 곳이었다. 1921년에 지어진 것으로 경주시 토지대장에 등록돼 있다. 늘 듣는 기차의 기적소리였지만 계절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르게 들렸다. 결혼하던 첫해 설을 앞두고 만삭의 몸으로 옥상에서 빨래를 걷을 때 “넌 고향에 안가니? 난 고향에 간다” 라고 들렸다. 목젖이 뻣뻣해지며 왈칵 눈물이 솟아났다. 황오리 지하도마을과 마을을 잇고 사람과 차들이 다니는 지하도가 있다. 폐지를 가득 실은 손수레의 뒤를 밀어주는 운전자, 한달음에 다 올라가지 못하고 내려서 자전거를 끌고 가는 중년 부인, 퇴근길 마중 나온 아내와 딸아이를 태운 가장, 하굣길 남학생들은 서커스를 하듯 자전거에 대롱대롱 매달려 내려갔다. 지하도 밑을 지나는 많은 순간들 속에서 늘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교통사고에 대한 불안감도 있었다.추억 경주역은 27일 23시 20분 부전역발 동대구역행 열차를 마지막으로 영업을 종료했다. 이제 경주역은 시간의 저편으로 사라지게 된다. 기차가 모롱이를 돌아가듯. 그러나 사라진다고 다 잊히는 건 아니다. 경주역은 경주를 기억하는 모든 이들에게 따뜻한 추억이 되어 오래 가슴에 남아 가끔씩 기적소리로 소환될 것이다. 경주의 문지기 역할을 담당했던 경주역은 1918년 10월 31일 개통했다. 경주역 총 영업일수 3만8855일이며 103년간 운행했다. 경주역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28일부터 대구·부산을 잇는 영남권 복선전철 시대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