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의 정체성을 한 말로 표현한다면 `길`이다.
다시 말해 문경은 `길의 고장`이다. 길은 사람과 물류 이동은 물론 문화의 통로이자 침략의 길목이기도 하다. 문경에는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관광지 1위`로 뽑혔고 근대 아리랑의 시원지 `아리랑고개`로 알려지기도 한 600여년의 역사를 지닌 옛길 `문경새재`가 있다.
문경은 땅 전체가 우리나라 지리문화의 보고이자 길 박물관이다. `문경새재`가 있는 것만으로도 유명하지만 우리나라 최고(最古, 서기 156년 개척)의 고갯길인 `하늘재(계립령)`와 옛길의 백미이자 한국의 차마고도로 일컬을 수 있는 `토끼비리(관갑천, 토천)`까지 있다.
이제 길의 다양성을 추구하기 위해 유사 이래 문경 땅을 밟은 왕들의 자취를 더듬어 `문경의 King Road(왕의 길)`를 찾아 역사를 반추할 기회를 가져보도록 하겠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사방불(四面石佛)은 모두 3기로서 경주와 충남 예산, 문경의 사불산(四佛山)에 각각 1기씩 남아 있다.
문경 대승사 사면석불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일연의 삼국유사에 `진평왕 9년(587)에 사면에 불상이 새겨진 한 길이나 되는 큰 돌이 붉은 보자기에 싸여 하늘에서 떨어졌다. 진평왕이 이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가서 사불암을 보고 절을 세우고 이름을 대승사라고 했다. 여기에 이름은 전하지 않으나 법화경을 외는 중을 청해 이 절을 맡겼으며 나중 중이 죽어 장사지냈더니 무덤 위에서 쌍연이 피었다`라고 돼 있어 `천강사불 지용쌍연(天降四佛 地湧雙蓮)`이라는 연기 설화가 남아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김춘추는 선덕여왕의 지시로 고구려에 가서 보장왕에게 백제를 치기 위한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보장왕은 죽령이 본디 고구려 영토이니 이를 돌려준다면 청을 들어주겠다고 했으나 김춘추가 나는 그런 결정을 할 위치에 있지 않다며 거절해 구금된 사실이 있었다. 이때 김춘추가 고구려로 갔던 길이 바로 하늘재(계립령)이다.
그리고 삼국유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지금의 문경과 상주 경계 지점에 당교(唐橋)가 있었는데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세력이 약했던 신라는 당나라와 손을 잡고 삼국통일을 이루게 됐으나 소정방이 고구려, 백제를 정벌하고 신라마저 치려고 이곳에 머물러 있었다. 이때 김유신 장군이 그들의 간계를 미리 알아차리고 당나라 군사를 초대해 잔치를 열고 대접하는 척하며 짐독을 넣은 술로 전멸시키고 땅에 묻은 곳이 당교(뙤다리)이며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루는 데 크게 기여한 중요한 사건이었다.
문경시 마성면 신현리에 `토끼비리`라는 곳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문경현지에 보면 `용연(龍淵)의 동쪽 언덕이고 토천(兎遷)이라고도 한다. 돌을 파서 사다리 길을 만들었는데 구불구불 거의 6∼7리나 된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고려 태조 왕건이 남하해 이곳에 이르렀을 때 길이 없었는데 토끼가 벼랑을 따라 달아나면서 길을 열어줘 갈 수가 있었으므로 토천(兎遷)이라 불렀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지금 우리가 부르고 있는 토끼비리라는 용어는 태조 왕건과 관련된 토끼 때문에 불리는 이름이다.
그리고 산양면 현리에 신라 시대 산성인 근품산성(편축, 퇴뫼식, 토석혼축, 1600m)이 있다. 삼국사기와 고려사에 `신라가 고구려를 방어하기 위한 산성이며 927년 후백제(견훤)의 땅이었으나 왕건이 1월에 용주(예천군 용궁)를 3월에 근품산성을 함락시켰으나 9월에 견훤이 다시 처서 성을 불태웠다`는 기록이 있으며 말을 훈련시켰던 `치마단`이란 지명도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