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레바퀴처럼 돌고 도는 것이 세월이렸다.
아침인가 싶으면 금방 저녁이 되고 낮이거니 했는데 밤은 또 순간에 찾아와서 사방은 쉽사리 어둠으로 휘덮힌다.
계절도 그와 같이 느긋하게 머물지를 못하고 맞이하여 앉힐 새도 없이 부지중에 와서는 부지간에 가버리고 만다. 이는 당연한 섭리요, 법칙이거늘, 보다 더 오래 향유하지 못하는 정회가 아쉬울 따름이다. 그와 같이 봄날을 앞세운 채 여름도, 가을도, 서둘러 떠난 뒤에, 눈앞의 만상은 온통 겨울 천지가 되고 말았다. 앙상한 나무들 가지마다 파랗게 새움 틔우고 들녘에는 요화들이 지천으로 흐드러져 꿈을 가꾸던 봄날의 따사로움은 어디로 갔나?
오는 세월 막지 못하고, 가는 세월 붙잡아 둘 수 없다는 평이한 속설이 이로 하여 발단했을 것인데, 사철의 진퇴여부를 두고 어찌 촌설로 설파하랴. 한때는 뜨거운 열정으로 이글거리던 불꽃 태양과 검푸른 잎사귀의 요란한 흔들림 하며 새소리, 물소리, 풀벌레 소리에 이르기까지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았던 지난 여름의 풍요함을 못잊어 하노라.
지금 그 모든 것은 자취를 감추어 한동안 올 수 없는 이방으로 순례의 길을 떠나 갔다. 기껏 남은 거라곤 오솔길에 쓸쓸히 뒹굴며 버석거리는 가랑잎들과 매무새 허름한 억새풀만이 거의 전부나 다름없는데, 호호막막 빈 들에 생명체의 동태인들 그리 흔할리 만무하지 않는가? 그저 춥고 을씨년스러울뿐인 자연, 그 속의 겨울.
겨울에는 모든 사물들이 움츠려서 동면을 이겨야 하는 혹독한 시련을 겪게 된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겨울을 은근히 반기는 편이다.
칼바람 세차게 불어 꽁꽁 얼음어는 강변의 호젓함과, 하얗게 눈덮히는 산골짝의 은은한 정취, 아니 그 같은 낭만적 분위기라기보다는 속 깊이 감춰져 있는 내면의 세계를 숭고하게 여기고 귀하게 생각한다. 가려져 있는 부분의 단층을 꿰뚫어 보는 지혜를 동원하여 시린 손 가슴에 넣고 혼자 초연히 걷는 파행!
그런 냉각된 기류속에서의 암울함을 달게 삭혀내는, 인고의 열매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겨울은 썰렁하고 삭막한 계절, 그래서 말이 필요치 않는 정각의 시간. 냉정한 사려와 아픈 고뇌로, 자기 스스로를 되살펴 보는 성찰의 때인지라 더더욱 그런지도 모른다. 나는 수행자처럼 묵묵히 이 겨울을 지내고 있다.
유연한 일상들이 돌처럼 경직되어 어쩌다 와르르 부서질까 염려되는 딱딱한 변화의 환경 안에서, 아무나 쉽게 짜 맞추지 못하는 퍼즐게임에 심취하여 고독한 행복으로 있으려 한다. 변화는 퇴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그 무엇의 새로운 시작과 발전을 내포하는 것이라 한다면 영하의 촉감에 불과한 동결의 과제 앞에서 묻어둔 불씨인 것처럼 따뜻한 온도를 채굴하여 스스로의 식은 몸을 데워야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아무리 날씨가 춥다 해도 살아 있는 것의 본능은 뜨겁지 아니한가. 그래! 그런 것, 겨울이야말로 새 생명이 만들어지는 태실이기 때문에.
들어보자. 어디서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얼어붙은 흙더미의 깊은 곳에서 탄생을 준비하는 떠들썩한 소리를, 아니면 저만치에 물러나 있는 계절을 불러들이려고 규칙있게 꿈틀거리는 씨앗의 박동을. 그렇게 기다려야 하는 겨울의 참다운 의미를 왜 아니 모를까.
나는 지금 새삼 뒷모습의 계절을 떠올리며, 화려했던 한때의 영광에 대하여 진단하고 분석하는, 연구의 시간표를 들춘다. 그러나 아직은 엄동의 절후. 무디고 미련해진 신경을 일깨우기 위해 자기 영혼의 아픈 뼈마디 속에 예리한 각성의 침을 찔러야 하는 용단이 필요하다.
갑작스레 경적을 울리며 나타나는 기관차처럼, 머지 않아 우리 곁엔 따스한 봄이 오리라.
봄날에는 다시 또 사방에 꽃이 필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