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덕 인량마을은 5대성(大姓) 8종가(宗家)가 터를 잡고 세거하고 있는 경북의 유학과 선비정신이 깃든 곳이다.
종가란 특정 가문의 적장자(嫡長子)로 계승돼 온 집안을 말하는 것으로, 조선 중기 적자상속제도가 정착하면서 형성된 한국적 가부장제의 특수성을 반영하는 개념이다.
종가제도는 훌륭한 조상을 모신 집안에서 적장자에게 재산을 상속함으로써 가문의 영속성을 보장하고 가문의 번영을 이루는 중심역할을 하는데서 출발했다.
그 뒤에 사제관계를 통해 맺어진 학맥에 기반 한 서원이나 지역 유림을 중심으로 선조의 위업을 계승하고 선양하는 일에 종가가 직간접으로써 종가제도는 더욱 발전하고 공고화 했다.
그래서 종가는 유교문화의 구심적 존재로서 조상의 학문적 역량과 바탕으로, 유형적 자산인 건축물과 유물·유적 등 문화재 자료를 보존하고 있으며, 무형적 자산인 의례와 음식, 문회, 가풍 등을 이어오고 있다. 종가는 보통 입향조로부터 시작한다. 현조로 모시는 조상이 터를 잡으면서 종가가 이뤄지고, 그 터에 자리 잡고 살면서 종가가 이어져 왔다.
종가의 중심인 종택의 공간 구조를 살펴보면 안채와 사랑채, 부속채, 행랑채 등으로 이뤄진 주거공간과 입향조나 불천위 위패를 모시는 사당 공간으로 구분된다.
주생활은 안채 중심의 여성공간과 사랑채를 중심으로 한 남성공간으로 엄격히 남녀의 공간으로 구분된다.
정침(正寢)은 주생활공간에서 사랑채보다 위계가 높으며(용마루가 사랑채보다 높음), 대체적으로 제사는 정침의 대청에서 지낸다.
종가하면 먼저 떠오른 것이 종부(宗婦)다. 종부에게는 봉제사 접빈객에 힘쓰면서 안으로 시부모를 봉양하고 안채의 화합과 친목을 유지해야 할 책무가 있었다.
바깥으로 드러나는 무게감이 덜하지만, 종부가 안에서 바르게 처신하지 않으면 종손도 제대로 역할을 수행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종부의 역할이나 책무는 종손 못지않았다.
◆강파헌 정침(江坡軒 正寢)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358호인 이 건물은 조선 숙종 때 청백리로 명성이 높았던 강파(江坡) 권상임(權商任, 1622~1700)이 건립한 살림집이다.
건축당시는 `ㅁ`형 집이었으나 전면의 사랑채 부분은 화재로 소실돼 정침 전면 좌측에 `ㅡ`형의 사랑채를 다시지어 건축당시의 `ㄱ`자형 정침과 함께 지금은 전체적으로 `ㄷ`형 평면을 구성하고 있다.
권상임은 1672년에 성균관에 등용된 이래 사헌부감찰, 충무위부사정(忠武衛副司正)을 거쳐 선전관사용(宣傳官司勇)이 됐다. 1675년(숙종1) 공조정랑에 춘추관기주관(春秋官記注官)을 겸임했으며, 성균관직강·호중어사(湖中御史)와 풍기군수·군기시부정(軍器寺副正)·사도시정(司 寺正)·봉상시첨정(奉常寺僉正)·제용감정(濟用監正) 등을 지냈다.
1692년 승문원판교에 춘추관편수관을 겸했고, 이듬해 벼슬을 사직하고 향리에 돌아와서 후학을 지도하여 많은 학자를 배출했다.
평생을 애민과 후학 양성에 노력해 외지에서는 군민들의 칭송을 들었고, 조정에서는 상사의 사랑을 받았다. 저서로는 `강파문집(江坡文集)` 3권이 있다. 강파헌 정침은 인량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가옥이다.
◆용암종택(龍巖宗宅) 용암종택은 조선시대 통정대부, 병조참의를 지낸 용암(龍巖) 김익중(金益重, 본관 善山)의 고택이다. 용암은 영조 대에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경북도 민속문화재 제61호인 이 집은 영조 4년(1728)에 건립됐다고 하며 천석을 하는 집으로도 알려졌다. 원래 대문간과 정침사이 좌우로 부속건물이 있었다 하나 현재 이 건물만 남아있다.
경북 북부지역에 있는 조선시대 양반가옥의 특징인 전형적인 `ㅁ`자형 건물이며, 사랑채의 지붕을 높게 팔작지붕으로 해 다른 건물과는 달리 격(格)을 높였다. 안채 안방 위쪽으로 고방을 두고, 고방 왼쪽으로 대청을 향한 곳간을 1칸 돌출시킨 것이 특색이다. 그리고 안채와 사랑채의 시야가 서로 넘나들지 않도록 아예 담으로 막아 놓은 것도 이 집의 특징이기도 하다.
◆삼벽당(三碧堂) 삼벽당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이중량(李仲樑, 1504~1582)의 종택이다. 이중량은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본관 永川)의 넷째아들로 중종 29년(1534) 식년시 병과에 급제해 여러 관직을 거쳐 선조 3년(1570)에 강원도관찰사로 임명됐다.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458호로 지정된 이 건물은 조선 중기에 건립된 것으로 전해온다. 건물의 평면은 `ㅁ`자형으로 구성돼 있다. 정침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5칸 반이며, 중문간 좌측 사랑채에 정면 2칸·측면 2칸의 사랑마루가 있다. 주요 구조부의 치목수법이 정교하며, 특히 대청 배면에 설치된 판문의 중간설주의 흔적은 옛 치목수법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만괴헌(晩槐軒)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209호인 만괴헌은 본래 야성정씨(野城鄭氏)의 고택이었다고 하며, 확실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다.
1815년 대지주인 야성정씨 후손 정상기(鄭象璣)가 이수민(李壽民)에게 매도했으며, 이수민은 1843년(현종 9)에 현 소유주자 신귀현(申龜鉉)의 6대조 신재수(申在洙, 본관 平山)에게 다시 팔았다고 한다. 안채·사랑채·대문채·자우행랑채 등으로 구성돼 있는 이 집은 정침은 정면 7칸, 측면 7칸으로 규모가 큰 편이다.
1990년 사랑채·대문채·우행랑채의 일부를 보수했고, 1996년 안채 및 좌우행랑채의 기둥과 기단 교체공사를 완료해 보존하고 있다.
만괴당은 조선후기의 가옥 변천사를 잘 보여주는 주거용 건물로서, 안방 도장방과 상방 앞쪽의 툇간 구성은 이 지방 `ㅁ`자형 주택의 전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만괴헌이란 당호는 신재수의 호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신재수는 1876년에 영해면에 있는 영해향교의 태화루(太和樓)를 개수해 지방유생들의 교육기관으로 사용하게 하는 등 많이 시혜한 공으로 조정에서 가의부위(嘉義副尉)를 특사 받았다.
이종훈 기자leejonghoon@naver.com 김경태 기자kkt2022@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