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덕 인량마을②  인량리는 영해에서 서쪽으로 십리 되는 곳에 삼면이 산으로 쌓여 있고 남쪽에 내가 가로 놓여 있는 산자수명(山紫水明)한 큰 동리다.  영해부지(寧海府誌)에 의하면 팔성종실(八姓宗室)이 있는 곳으로 예부터 풍속이 순하며 예의와 겸양이 있고 효행과 학문이 높은 선비가 많아 벼슬이 끊어지지 않으니 부내(府內)에서 으뜸가는 동리라 했다.  또한 마을이 생긴 이래로 임진왜란부터 병자호란, 구한말 독립운동사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구국(救國)에 참여해온 의사들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이 마을에는 크고 작은 고가옥(古家屋)과 많은 문화재가 산재돼 있으며, 특히 전통테마마을과 정보화마을로 선정돼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마을로 군내에서 다른 마을보다 앞서가고 있다. ◆우계종택(遇溪宗宅) 우계종택은 조선 선조 때 재령이씨 영해 입향조 이애의 손자인 운악(雲嶽) 이함(李涵)의 차남 우계(遇溪) 이시형(李時亨)의 살림집으로 건립된 후 지금까지 400년 가까이 우계파종가로 보존되고 있다. 이시형은 1586년(선조 19)에 이곳 인량리에서 태어났으며, 우애와 효도가 극진해 부친 이함이 의령현감으로 부임할 때 집안일을 도맡아 보살폈다.  사려가 깊고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당시 영해부(寧海府)에서 시비가 있을 때면 간명하고 설득력 있는 문장으로 화해를 주선하곤 했다고 한다.  1612년(광해군 4) 과거에 응시하고 돌아오는 길에 27세의 젊은 나이로 외가가 있는 안동 주촌에서 별세했다.  이 건물의 형태는 정면 5탄, 측면 4칸의 `ㅁ`자형 나무로 지은 기와집으로, 막돌 기단 위에 자연석 주추를 놓고 사각으로 된 기둥을 세운 홑치마 팔작지붕으로 만들어진 조선중기의 전형적인 양반가옥이다. 건립당시에는 대문채 및 행랑채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없다. 1995년 6월 19일 경북도문화재자료 제307호로 지정됐다가, 2013년 7월 11일 경북도 민속문화재 제184호로 승격됐다. ◆갈암태실 자운정 자운정은 재령이씨 입향조 이애의 손자 운학의 셋째아들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이 처음 분가해 살림난 집터. 영남학파의 거두이자 이조판서를 역임한 갈암 이현일이 태어난 태실이 바로 이곳이다.  자운정의 안주인은 `음식디미방`의 저자인 정부인 안동 장씨 계향이다. 장계향은 19세 되던 1617년 안동에서 200리 떨어진 이곳 나라골(인량리) 이시명에게 출가했다.  그는 일곱 아들을 뒀는데 첫째가 전처소생 정묵재(靜默齋) 이상일(李尙逸)이고, 둘째는 존재(存齋) 이휘일(李徽逸), 셋째가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넷째 항재(恒齋) 이숭일(李嵩逸), 다섯째 정우재(定于齋) 이정일(李靖逸), 여섯째 평재(平齋) 이융일(李隆逸), 일곱째는 이운일(李雲逸)이다.장계향은 이 자운정에서 갈암을 낳고 충효당에서 길렀다고 한다. ◆오봉종택(五峯宗宅) 오봉종택은 1450년대에 안동권씨(安東權氏) 부정공파(副正公派) 영해 입향조인 오봉(五峯) 권책(權策)이 거주하던 곳으로 200여 년이 지난 후 화재로 소실된 것을 재건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영덕에 안동권씨가 뿌리내리게 된 계기는 조선 6대 임금 단종의 외숙부이자 현덕왕후(문종의 비)의 아우인 권자신(權自愼)이 성삼문 등과 단종복위 운동을 하다 화를 당하고, 그의 아들 오봉 권책이 이곳에 유배 오면서 부터다.  이 집의 배치는 솟을삼문과 사랑채인 오봉헌(五峯軒), 사당(祠堂)을 잇는 중심축에서 우측으로 종택이 자리하고, 왼쪽 높은 축대 위에는 벽산정(碧山亭)이 위치하고 있다.  사당은 오봉헌 보다 높게 대지를 조성한 후 토석담장을 둘러 공간의 위계상을 높였다.  종택은 과거의 평면형과 형태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나 최근에 보수하면서 당시의 흔적은 손상된 상태다.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538호인 이 집은 영덕 영해지역 안동권씨 가문의 정신적 구심점 기능을 해왔다. ◆지족당(知足堂) 지족당은 조선 영조 때 전북 장수현감으로 재직한 지족당 권만두(權萬斗, 1674~1753)가 1727년(영조 4)에 지은 집이다. 권만두는 171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공조정랑이 되고, 사관(史官)으로서 경연관을 겸했다.  1725년 장수현감이 돼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고 부역을 감하는 등의 선정을 베풀었다. 사임한 뒤 고향에서 후진을 양성하는 한편 유생들과 함께 `사례절요서(四禮節要書)`를 짓고, `영해읍지(寧海邑誌)`를 편찬했다. 저서로는 `지족당집(知足堂集)`이 전한다.  경북도 문화재 자료 제274호인 지족당은 `ㅁ`자형으로 전면 좌우측이 옆으로 돌출한 양날개집 형상을 하고 있으나, 사랑채가 팔작지붕으로 돼있어 마치 독립된 것으로 보인다.  안채부분의 평면구성은 이 지역 `ㅁ`자형 주거건축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이종훈 기자leejonghoon@naver.com 김경태 기자kkt202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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