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덕군 인량리 전통마을(창수면 인량1, 2, 3리)은 영해면 등운산(786m) 지맥이 내려온 산줄기 아래 학이 양쪽 날개를 펼치는 듯한 형상을 이루고 있어 비개동(飛蓋洞), 나라골, 익동(翼洞) 등으로 불리던 마을이다.
이 마을은 선비의 문(文)과 도(道)가 전통으로 지켜져 내려오며 인자한 사람을 많이 배출했다고 해서 지금의 마을 이름인 인량리로 부르게 됐다. 넓은 들과 송천이라는 개천이 흐르는 길지 중의 한 곳으로 꼽히는 이 마을에는 5대성(大姓) 8종가(宗家)가 터를 잡고 세세토록 거주하고 있다. `작은 안동(小安東)이라고 부리기도 했던 이 마을에는 재령이씨의 충효당, 갈암종택, 우계종택을 비롯해 안동권씨 강파헌 정침, 지족당, 오봉종택과 평산신씨의 만괴헌, 선산김씨 용암종택, 영천이씨 삼벽당 등 수백 년 된 고택들은 세월의 풍파를 겪으면서도 보수되고 증축되며 지금까지 남아 문화재로 지정돼 보호를 받고 있다. 전통 마을은 흔히들 그러하듯 인량마을 동리 입구에도 커다란 느티나무가 마을의 역사를 안은 채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다.
◆영덕 충효당(忠孝堂) 고택은 수백 년 동안 지속된 선조의 삶의 터전이자 생활공간이다.
이 때문에 나무한 그루 풀 한포기 조차 사연을 품고 있다.
영덕 충효당은 재령이씨의 입향조인 통정공 이애(1480~1561)가 15세기 중엽 조선 성종(成宗) 연간에 건축한 집이다.
이후 후손인 운악 이함(李涵)이 선조(宣祖) 9년(1576)에 뒤쪽 한단 높은 곳으로 이건했다고 한다. 퇴계 이황(李滉)의 성리학을 계승해 영남 유학을 중흥시킨 갈암(葛菴) 이현일(李玄逸)이 출생한 곳이기도 하다. 이 집은 인량마을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건물 구성은 안채·사랑채·사당 등 3동으로 넓은 대지 위에 남향으로 자리 잡았다.
`ㄱ`자형 안채와 `ㄴ`형인 사랑채가 붙어 튼 `ㅁ`자형 건물이며, 정면 7칸, 측면 5칸의 쾌 큰 규모로 담장 길이만도 100m가 넘는다. 후원에는 상당히 넓은 대밭이 있다.
충효당은 정침과 독립돼 건립된 사랑채의 당호로서 정자와 같은 모습을 취하고 있다. 규모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ㄱ자형 팔작집이다. 동쪽의 2칸반이 온돌이고 나머지는 마루로 꾸몄다.
사당은 담장으로 구획돼 있으며, 문으로 들어서면 중앙에 아름드리나무 괴목(槐木) 한 그루가 좌우로 `V`자 같이 팔을 벌리고 서 있어 눈길을 끈다.
이 집은 별도의 솟을대문과 같은 대문채는 없고 사람이 드나들기조차 좀 작은 느낌의 일각대문이 출입문이다. 외떨어진 곳에 자리한 관계로 일부러 담을 막고 대문을 만들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중요민속자료 제168호로 지정된 이 가옥은 조선 중기에 건축한 양반가 종택 건물의 전형으로, 경사진 언덕에 앞으로만 석축을 쌓아 지대를 만드는 등 건물 배치에 주위 자연경관과의 조화를 꾀했다. 당시 사대부들의 건물에 의한 의식과 주택 연구의 좋은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갈암종택(葛菴宗宅) 경북도 기념물 제84호인 갈암종택은 조선 후기 문신이며 성리학자인 갈암(葛菴) 이현일(李玄逸, 1627∼1704)의 종가이다.
갈암 선생은 조선 숙종 때 이조판서를 지냈고 영남학파의 거두로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어 받아 `이기호발설`을 지지했으며, 서인의 탄핵을 받아 귀양을 가기도 했다. 저서로는 `갈암집(葛菴集)`과 `홍범연의`가 있다.
이 집은 경북 북부지역의 전통적인 `ㅁ`자 형태이다. 갈암은 원래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에서 출생하고 자랐으나 선생이 40세 되던 해에 영양군 입암면 병옥리로 옮겼다.
선생의 10대손이 청송군 진보면 광덕리로 옮기면서 1910년 종가를 세웠으나 임하댐 건설로 1992년 갈암태실이 있는 이곳에 이건했다.건물은 정면 6칸 측면 4칸 반의 `ㅁ`자형 팔작 기와집으로 오른쪽 측면으로 사랑방과 사랑대청이 돌출해 있다. 원래의 건물은 길암의 8대손인 이수악(李壽岳)과 9대손 이회발(李晦發)이 항일 구국운동의 거점으로 활용하기도 했던 곳으로 역사성이 있는 종택이라 할 수 있다.
이종훈 기자leejonghoon0@naver.com 김경태 기자kkt2022@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