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시리 전통마을  영덕의 북쪽인 영해면소재지에서 동북으로 1㎞ 정도 가면 조선시대 전통가옥이 즐비한 영양 남씨(英陽 南氏)의 집성촌인 괴시리 전통마을이 있다. 고려 말의 대학자 목은 이색(李穡, 1328~1396) 선생이 태어난 외가마을이기도 하다. 동해로 흘러가는 송천 주위에 늪이 많고, 마을 북쪽에도 도랑이 있어 옛날에는 도랑 `濠`자와 연못 `池`자를 써서 `호지촌(濠池村)`이라 불렀다. 괴시(槐市)라는 이름은 고려 공민왕 8년 목은 선생이 원나라에서 유학한 후 귀국길에 잠시 들른 중국 구양박사방(歐陽博士坊)의 괴시마을과 고향 호지촌이 비슷해 붙인 것이다. 이 마을은 1260년(고려 고종 46) 함창김씨가 처음 터를 잡은 뒤 수안김씨, 영해신씨 등이 살아오다가 인조 8년(1630) 영양남씨가 처음 정착해 점차 집성촌을 이뤘고, 이후 400년 가까이 흘렀다. 함창김씨는 목은 이색의 외가이며 선생의 외조모가 지금 괴시마을을 이루고 사는 영양 남씨다.  망일봉(150m)을 끼고 영해평야를 바라보는 이 마을은 기와 토담 골목길을 중심으로 200~300년 된 고택들이 서남향으로 첩첩이 자리 잡아 조상의 생활과 멋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다. 주택양식은 조선후기 영남지방 양반가옥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마을의 핵심적인 위치에 자리한 영양 남씨 괴시파 종택을 비롯해 30여 채의 가옥 가운데 물소와고택(勿小窩古宅), 물소와서당(勿小窩書堂), 대남댁(臺南宅), 주곡댁(注谷宅), 경주댁(慶州宅) 등 국가 및 경북도 문화재자료만도 14점이나 된다. 마을을 둘러 언덕 높은 곳으로 오르면 목은 기념관과 선생의 동상, 팔각정 등이 있는 유적지를 만난다. 기념관에는 이색 선생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양양 남씨 괴시파 종택  이 집은 현 소유자의 12대조인 남붕익(南鵬翼, 1641~1687)이 약 300년 전인 17세기 말에 건립했다고 전하는 영양남씨 괴시파의 종택으로 정침(正寢)과 사당(祠堂)으로 구성돼 있다.  영양남씨 괴시문중은 시거조 남두원 공에서 비롯되는데, 공의 장남이 바로 붕익이다. 남붕익은 1672년(현종 13)에 대과에 급제해 예조좌랑, 영산현령을 지냈다.  종택 건물은 건축 후 수차 중수를 한바 있다. 1919년경에는 전체적인 부재를 교체하고 기와를 새어 얹었으며, 1984년에도 일부 노후 부재를 교체하는 등 부분적인 수리를 했다. 때문에 평면구성이나 형태에서 약간의 변화는 있으나 전체적인 공간구성이나 평면구성에서 조선 후기 주택의 소박한 품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 정침은 정면 8칸, 측면 5칸 반으로 `口`자형의 안채 우측에 사랑채가 돌출돼 있어 한쪽날개집의 형태를 보인다. 안채는 정면 3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 안방과 부엌, 우측에 상방(上房)과 부엌이 있는데 상방부분은 원래 반칸의 마루를 깔았던 것을 방으로 개조한 것이다. 사랑채는 재청방(齋廳房)인 1칸의 사랑윗방과 2칸의 사랑마루로 돼 있다. 이 종택은 경북도 민속문화재 제75호로 지정돼 있다. ◆물소와고택(勿小窩古宅)  경북도 민속문화재 제169호인 괴시동 물소와고택은 조선시대 좌승지에 추증된 물소와(勿小窩) 남택만(南澤萬, 1729~1810)이 종가에서 분가할 당시 그의 증손 남유진(南有鎭)이 건립했다.  연대가 정확하지는 않으나 건물 장여 밑에 `甲子(갑자) 十二月(12월) 二十七日(27일) 辰時(진시) 上樑(상량)`이라는 기록과 치목수법, 보존상태, 건축양식 등으로 미뤄볼 때 1924년 중수한 것으로 짐작한다.  정면 5칸, 측면 6칸의 `口`자형 정침과 고방, 중문, 사랑 등으로 구분돼 있는 조선 후기 주택양식의 전형적인 건물이다. 이 집은 당시 유교적 윤리에 의해 출입구부터 엄격히 분리된 남녀의 생활공간이 특징이다. ◆천전댁(川前宅)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378호인 천전댁은 남유용(南有鏞)공이 1876년(고종 13)에 건립한 건물로 추정되며 안채, 사랑채, 문간채 등으로 이뤄져 있다. 안채와 사랑채가 이어지는 U자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어 속칭 `날개집`이라 불리는 유형에 속한다. 특히 사랑채는 중문의 우측 앞에 자리 잡고 있는데 중문칸 보다 건물을 높게 세우고 별도로 팔작지붕으로 꾸며 독립된 건물처럼 보이게 했으며, 추녀의 곡선이 빼어나 더욱 더 아름답다. ◆대남댁(臺南宅)  경북도문화재자료 제197호인 괴시동 대남댁은 1766년(영조 42)에 성균관 생원인 괴정 남준형(槐亭 南晙衡, 1703~1778)이 건립했다.  안대청 상부 종도리 및 장혀 부분에 `신해(辛亥) 2月 18일 묘시입주동시상량`이라는 기록을 보아 1911년에 중수한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서쪽을 보고 있는 이 가옥은 정면 4칸 반, 측면 6칸 반 규모의 `口`형이다. 막돌로 비교적 높게 쌓은 기단위에 자연석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웠다.  안채는 안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도장방과 안방이 있고 부엌으로 연결됐다. 오른쪽에는 샛방과 곳간이 익사(翼舍)를 이루며 사랑과 연결돼 있다. 샛방과 곳간 사이에는 통마루가 있어서 안채 왼쪽의 안방과 연결된다. 중문 오른쪽에 있는 사랑채는 앞에 큰사랑과 사랑마루가 있고 그 뒤로 윗사랑과 아랫사랑이 연접돼서 내부공간이 나뉜다. 이 집은 태남댁(台南宅) 또는 괴정고택(槐亭古宅)으로 불리기도 한다. ◆영감댁(令監宅)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424호인 괴시리 영감댁은 호은(濠隱) 남흥수(南興壽, 1813~1899)가 1847년(헌종 13)에 건립하고, 그의 증손 남대철(南大轍)이 1938년 중수했다. 1950년대까지는 대문채, 방앗간, 마구간이 있었으나 현재는 없어졌다. 정침은 정면 4칸, 측면 6칸의 `口`형 건물이다. 안채 우측 상방 외부에 툇마루를 설치했는데 상방외부에 툇간을 두어 툇마루를 설치한 수법은 경상도지역에서 흔한 방법은 아니다. 상방의 외부뒤편에 설치한 감실은 괴실마을 내 물소와고택은 안방에, 주곡댁과 천전댁은 사랑방에 두는 예와는 다르다.     이종훈 기자leejonghoon@naver.com 김경태 기자kkt202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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