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서원은 영남 사림의 중심이자 퇴계 이황을 모신 곳으로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위치하고 있다. 서원으로 가는 길은 안동시내에서 동북쪽 청량산을 향해 뻗은 `퇴계로`를 따라 가야 한다. 이 35번 국도를 따라 봉화방향으로 27㎞쯤 가다 보면 오른쪽에 도산서원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이곳에서 1.5㎞정도 가면 대형주차장과 상가 그리고 매표소가 있다. 여기에 차를 세워놓고 300m정도 걸어서 들어가면 도산서원에 닿는다. 서원 앞마당에 서 있는 향나무, 왕버드나무, 느티나무와 매화나무 같은 오랜 고목들의 자태를 감상하며 오른쪽을 바라보면 `열정`이라는 우물이 있다. 물이 맑고 물맛이 좋아 이황선생이 식수로 사용했다고 한다.
도산서원 입구로 향해 계단으로 올라서면 오른쪽 건물이 `도산서당(陶山書堂)`이다. 이 서당은 퇴계가 낙향 후 거처하면서 제자를 가르치던 곳으로 소박한 세 칸짜리 작은 서당이다. 퇴계는 도산서당을 짓기 전 계상서당(溪上書堂)에서 학문을 연마하며 후학을 가르치다가 그 터가 마음에 들지 않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퇴계의 말년인 61세(1561년) 되던 해였다. 18세기에 겸재 정선이 그린 도산서원도를 보면 넉넉한 낙동강 물이 서원 앞을 유장하게 흘러갔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때 우리나라 산천경개를 두루 살피며 사대부들이 살 만한 곳을 논했던 조선중기 실학자 이중환이 쓴 `택리지`에는 시냇가의 살만한 곳으로 예안의 도산과 안동의 하회를 첫째로 삼는 다고 씌어 있다. 퇴계는 이중환 보다 앞서 이곳을 선택한 것일까?
퇴계가 직접 설계했다는 도산서당 건물의 중앙에는 글을 읽는 완락재(玩樂齋), 동쪽으로는 마루방인 암서헌(巖棲軒), 서쪽에는 작은 부엌이 있다. 서당 건너편에는 공부하는 유생들을 위해 `사(舍)` 8칸을 지었는데 각각 `시습재(時習齋)`, `지숙료, 관난헌(觀난軒)이라 이름 짓고, 합해서 농운정사라고 했다. 퇴계가 처음 지은 건물은 자신이 기거하는 도산서당과 유생들이 기거할 이 농운정사 뿐이었다.
농운정사는 평면이 工자로 뒷방 쪽에 햇빛이 들지 않아 일반 민가에서는 잘 짓지 않는 형식이다. 그러나 퇴계는 직접 설계도를 그리고 짧은 처마를 사용해 빛을 받도록 배려하면서 이 형식을 고집했다. 그것은 이런 工자형 집이 기숙사 건물로 적합하며 공부(工夫)한다는 뜻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황은 건물뿐 아니라 뜰에도 정성을 쏟았다. 작은 연못을 파서 `정우당(淨友塘)`이라 하고 군자의 꽃인 연꽃을 길렀으며 동쪽 언덕에는 `절우사(節友社)`라 하여 매화나무, 소나무, 대나무, 국화 등 군자의 절개를 상징하는 꽃과 나무를 심어 직접 가꾸었다. 작은 싸리문은 유정문(幽貞門)이라 이름 붙였다.
모란과 매화가 심어진 고운 계단, 화계를 올라가면 비로소 도산서원이 시작되는 `진도문(進道門)`을 만난다. 이 진도문 양쪽으로 책을 보관하는 `광명실(光明室)`이 있는데 누각을 높이 지어 습기를 막도록 했다.이는 책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한 조상들의 건축적인 지혜를 엿보게 한다.
도산서원은 선생이 돌아가신 후 선조 7년(1574년)에 퇴계 이황의 학문과 덕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다. 중심건물인 `전교당(典敎堂)`은 강학공간이다. 보물 제210호로 지정된 전교당 정면에는 `도산서원(陶山書院)` 현판이 걸려 있다. 선조가 명하여 조선 중기의 명필 한석봉이 쓴 것이다.
앞마당에는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 `박약재(博約齋)`와 서재 `홍의재(弘毅齋)`가 있고, 박약재 뒤편에는 서원에서 찍어낸 각종 목판과 이황의 문집을 보관하는 `장판각(藏板閣)`이 있다.
서원의 가장 높은 곳에는 이황의 신위가 모셔진 `상덕사(尙德祠, 보물 제211호)`가 있다. 이곳에는 이황의 수많은 제자 중 조목(趙穆, 1524~1606)이 유일하게 스승과 함께 모셔져 있다. 조목은 도산서원을 세우는데 공이 컸고, 1600년 `퇴계문집` 초간본을 만든 사람이다.
전교당에는 정문 말고 서쪽으로 쪽문이 하나 있다. 쪽문으로 들어서면 상고직사와 하고직사가 위아래로 있다.
상·하 고직사는 이를테면 서원 관리인이 기거하던 곳으로 음식을 만들기도 해 주사(廚舍)라고도 한다. 검소하고 조촐한 건물이다. 거기서 내려오면 옥진각에 이른다.
옥진각은 1970년에 지은 유물전시관이다. 여기에는 퇴계가 생전에 쓰던 베개와 자리, 명아주대를 말려 만든 지팡이인 청려장, 매화벼루와 서궤 등 손때가 묻은 유물이 많이 전시돼 있다.
또 천체의 운행과 성좌를 관측하는 천문기구인 혼천의(渾天儀)도 있는데, 이는 퇴계가 설계하고 제자인 간재 이덕홍이 만든 것으로 퇴계의 자연과학적 관심도를 알 수 있는 유물이어서 흥미롭다.
서원을 나와 건너편을 보면, 안동호 가운데에 섬처럼 둔덕이 솟아있고 그 가운데에 작은 집 한 채가 있다. 바로 시사단(試士壇)이다. 시사단은 정조가 1792년 이황의 학문과 덕, 그리고 유업을 기리기 위해 `도산별과`를 시행했는데, 이 과거시험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각이다.
이 당시 응시자가 많아서 과시 장소를 도산서원으로 하지 못하고 아래로 내려와 강변에서 과거를 치렀다고 한다.
답안지를 제출한 사람만도 3,632명이 이르는 대규모 시험이었다. 1975년 안동댐 건설로 물속에 잠기게 되고, 이후 흙을 10m 쌓아 올린 것이 지금의 시사단 모습이다.
시사단을 가려면 강가로 내려가 나룻배로 건너야 한다.
강 쪽으로 가는 길은 이제 통로로서의 의미는 잃었지만 산책삼아 거닐어 볼만 하다.
본래 아래에서부터 오르는 것이 제 길이었으니 퇴계가 오솔길의 기슭 풍광이 아름다운 곳에 곡구암, 천연대 같은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요즈음 오르는 길은 도산서원의 옆구리로 들어가는 서쪽 기슭에 낸 것인데 그 길가에도 천광운영대가 있어 안동호를 내려다보기에 좋다. 이종훈 기자leejonghoon0@naver.com 윤재철 기자chal201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