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서원을 중심으로 한 도산면 일대는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의 발자취가 어린 곳들이 많다. 퇴계가 태어난 퇴계태실은 진성이씨 온혜파 종가로 온혜리에, 퇴계가 살았던 퇴계종택은 토계리 상계동에, 그리고 묘소는 하계동에 있다. 모두 2~3㎞ 거리 안에 있는 곳들이다. 퇴계는 좌찬성 이식(李埴)과 밀양박씨의 사이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퇴계태실은 도산서원과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두고 3㎞ 거리인 도산면 온혜리에 있다. 이곳에는 퇴계의 할아버지인 노송정 이계양(老松亭 李繼陽)이 1454년에 지었다는 `노송정고택`이 있는데, 이집이 바로 퇴계태실이다.
퇴계는 이집에서 나서 생후 7개월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래서 어릴 때에는 사랑채인 노송정에서 할아버지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컸다. 열두 살 때에 숙부인 송재 이우(1469~1517)로부터 `논어`를 배웠고, 스무 살 무렵에는 주역에 심취해 위장병을 얻을 만큼 공부에 열중했다. 스물셋에 과거에 응시했으나 세 번이나 떨어졌다가 스물일곱에야 진사시에 합격하고 서른셋에 문과에 합격해 비로소 벼슬길에 나갈 수 있었다.
첫 벼슬은 외교문서를 다루는 승문원 관리 직책이었고 43세에 성균관 대사성이 이르렀다. 외직으로는 풍기 군수를 지냈다. 50세에 관직에서 물러나와 57세에 도산서당을 짓기 시작해 61세에 완성하니 전국에서 학문을 연마하려는 제자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았다. 이곳에서 학봉 김성일, 서애 류성룡, 한강 정구 등 360여 명이나 길러냈다.
퇴계는 70세에 생을 마쳤다. 돌아간 뒤에는 동방오현(東方五賢)의 한사람으로 문묘에 배향됐다. `퇴계`라는 호는 이황이 살던 토계리를 따서 지은 것이다. 원래 토계(兎溪)이던 것을 이황이 퇴계(退溪)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그 도산면 토계리에는 진성이씨 퇴계파의 종가인 퇴계종택이 있다.
◆퇴계종택(退溪宗宅) 안동시 도산면 백운로 268(토계리 468-2)에 있는 퇴계종택은 경북도 기념물 제42호로 지정돼 있다. 옛 종택은 일본군의 1907년 방화로 모두 타 버렸고, 현재의 종택은 13대손 하정공 이충호(李忠鎬)가 1926~1929년까지 3년에 걸쳐 지은 것이다. 총 34칸의 건물로 전체적으로 보면 5칸 솟을대문과 `ㅁ`자형 정침(正寢 : 주택의 가장 중심이 되는 집 또는 방)이 있는 영역, 그 동북쪽 약간 뒤로 같은 규모의 5칸 솟을대문과 `추월한수정`으로 이뤄진 영역, 그리고 이 두 영역의 뒤쪽에 있는 사당 영역 등 세개의 영역이 각각 담장으로 구분돼 있다. 대문채는 솟을대문의 양쪽에 온돌방을 2칸씩 꾸몄고, 사랑마당을 면한 사랑채는 안채보다 기둥 간격을 좁힌 정면 7칸, 측면 2칸 규모다. 동측 4칸은 앞쪽에 툇마루를 길게 놓고, 뒷 칸에는 동에서부터 서로 사랑마루방과 사랑방을 2칸씩 들였다. 서측 3칸은 책방·작은 사랑방·서향한 툇마루로 이뤄져 있다. 안채부분은 정면 6칸, 측면 2칸인데 두 칸 안대청 동측에 앞뒤 통간으로 된 건너방이 있고, 서측에 있는 안방 2칸은 복합문으로 통하게 된 통간방들로 앞쪽에 남긴 툇마루만큼 뒤로 반 칸을 물렸다.안방 서쪽에 접한 부엌은 2칸통이고 앞쪽은 안마당에서 밖으로 드나들 수 있는 문간과 한 칸 방 두 개와 고방이 차례로 있으며, 동쪽 익사에는 앞에서부터 중문, 광, 방, 문간이 각 한 칸씩 있다.
◆추월한수정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은 자연석으로 다섯 단을 쌓은 계단이 좌우에 나란히 설치된 기단 위에 앉아 있다. 이 건물은 정면 5.5칸, 측면 2.5칸의 ㅡ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다섯 칸 넓이의 대청 서쪽에는 한 칸과 칸 반 온돌방을 앞뒤로 놓았고, 동측에는 동서로 긴 2칸통 방을 앞뒤로 배치하고 전면에는 반 칸 폭의 툇마루를 길게 놓았다. 전면의 기둥들과 대청배면의 가운데에는 두리기둥으로 하였고, 오량가구에 제형 판대공을 세운 민도리집이다. 화강석 기단 위에 서 있는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인데 전면에는 반 칸이 약간 넘게 뒤로 물려 퇴칸으로 꾸몄다.추월한수정은 정자로 지었지만, 정자라고 보기 보다는 일반 가옥과 같이 보인다.
◆안동권씨 정려 정려(旌閭)는 행실이 열녀로 다른 사람의 본보기가 되는 삶을 살았으므로 나라에서 잘 보이는 곳에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설치했다.
하지만 퇴계 손자며느리 안동권씨의 정려는 정려각이 없이 종택 솟을대문에 걸어놓았다.
별도의 정려각 없이 솟을대문에 정려를 걸어 놓은 것은 퇴계 가문의 검소함의 상징으로 느껴진다.
정려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烈女通德郞行司 署直長李安道妻恭人安東權氏之閭(열녀통덕랑행사온서직장이안도처공인안동권씨지려)
◆퇴계 묘소 종택에서 나와 하계동으로 1.5㎞ 남짓 가면 퇴계의 묘소가 있다. 길 오른쪽에 제법 경사가 가파른 석축계단이 놓인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옆으로 근래에 세운 작은 빗돌에는 `양진암구지(養眞菴舊止)`라고 새겨져 있다. 양진암은 퇴계가 46세 때에 지은 것으로 성리학에 전념하던 곳이다.
그 집터의 뒤쪽 산등성이에 퇴계를 모셨다. 묘소 앞에는 간략하게 상석이 있고, 양쪽에 중국 동자머리를 한 석상 한 쌍이 마주보고 있다.
얼굴이 많이 마모되기는 했어도 귀염성 있는 모습은 남아 있다. 동쪽에 놓인 조촐한 비석에는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는 글씨와 함께 손수 찬한 간략한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종훈 기자leejonghoon0@naver.com 윤재철 기자chal201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