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로지향(鄒魯之鄕)의 고장 안동 기행(1)
우리나라 정신수도라고 일컫는 안동은 공자와 맹자의 고향이라는 추로지향((鄒魯之鄕) 곧 `양반의 고장`으로 불린다. 그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안동이 사림의 고장으로 자리 잡았고, 그 전통이 아직도 면면히 이어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무형의 문화유산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양반마을로 잘 알려진 하회, 퇴계선생의 이야기가 서린 도산서원, 봉정사를 비롯해 여러 권역으로 나눠 안동의 문화유산을 답사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그 가운데 임진왜란 때 영의정으로 널리 알려진 서애 류성룡을 배출한 하회마을에 먼저 들렸다.
◆하회마을 하회는 안동시 풍산읍에서 안으로 더 들어간 곳에 있다. 안동댐에서 내려오는 본류와 반변천이 만나 남쪽으로만 흐르던 낙동강이 하회에 이르러 잠시 동북쪽으로 선회해 큰 원을 그리며 산을 휘감아 안고 산은 물을 얼싸안은 곳에 터 잡은 마을이다. 이렇게 물이 돌아 나간다고 해서 `물돌이동`이라 하고, 한자로는 하회(河回)라고 이름 붙였다.
하회마을은 2010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경주 양동마을과 함께 가장 한국적인 문화가 살아 숨 쉬는 곳으로 세계적인 관심을 받고 있다.
풍산류씨(豊山柳氏)가 600여 년 간 대대로 살아온 혈연마을인 하회에는 기와집과 초가가 오랜 역사 속에서도 잘 보존돼 지금도 그 숨결이 계속 흐르고 있는 곳이다.
마을 입구에는 풍산류씨 입향조 공조전서(工曹典書) 류종혜(柳從惠)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기적비가 있다. 전서공(典書公)은 풍산 상리에 살다가 길지(吉地)를 찾아 하회마을에 터전을 이뤘다.
그 후 이곳에서 류성룡과 그의 형인 류운룡, 아들 류진 등을 배출했다. 이곳 하회마을에는 류성룡의 아버지 류중영과 류운룡을 불천위로 모시는 대종택인 양진당과 류성룡의 종택으로 소종택인 충효당이 있다.
그밖에 하동고택·북촌댁·남촌댁 등 기와집이 즐비한 가운데 초가집이 드문드문 있는데 이는 종가집에서 부리던 사람들이나 소작인들이 살던 살림집이다. 이들 집들 가운데는 보물로 지정된 곳이 둘,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곳이 아홉이나 된다.
◆양진당 보물 제306호인 양진당은 충효당과 함께 하회를 대표하는 저택으로 겸암 류운용(謙庵 柳雲龍, 1539~1601)이 기거한 풍산류씨 대종택이다.
이 집은 마을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으며, 입향조인 류종혜가 처음 터를 잡은 곳으로 조선 전기 사대부가옥의 전형을 보여준다.
`양진당`의 편액(현판)이 걸린 것은 겸암의 6대손 류영(柳泳, 1687~1761) 때부터다. 그의 자는 덕유(德游) 또는 학가(學可)였고, 호는 양진당이었다.
집 온채는 ㅁ자형의 안채와 그 북쪽에 있는 ㅡ자형의 사랑채, 동쪽으로 역시 ㅡ자형의 행랑채로 이뤄져 있다.
이 세 건물은 모두 연결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나, 다만 사랑채에서 마당을 건너 북쪽에 있는 사당만은 따로 자리하고 있다.
양진당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사랑채가 있다. 사랑채의 당호는 `입암고택(立巖古宅)`으로 석봉(石峯) 한호(韓濩)가 썼다.
사랑채는 정면 5칸과 측면 2칸 즉 10칸의 크기이고, 6칸 대청은 사대부 가옥에서 지을 수 있는 최대 칸수를 자랑한다.
안채는 서쪽 귀에 4칸짜리 부엌을 두었고, 오른쪽에 정면 2칸 측면 1칸인 안방이 있으며, 안방과 나란히 한칸반 크기의 온돌방이 붙어있다. 마루가 안채의 대청구실을 하는 셈이다.
대청은 1칸 남짓한 건너방에 연결된다. 이 방 다음에 한 칸의 마루가 있고 그것이 사랑채에 연결되어 있어 신을 신지 않고도 사랑채로 갈 수 있다.
사당은 대소 2개의 건물로 이뤄져 있으며, 겸암과 그의 부친 풍사부원군 류중영의 불천위를 모시는데, 부자를 한 사당에 함께 모실 수 없다하여 겸암을 별묘로 모시고 있다. 하나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큰 사당이고 다른 하나는 정면 2칸 측면 1칸의 작은 사당이다.
◆충효당
보물 제414호인 충효당은 남촌을 대표한다. 본래 단출한 살림집이었던 것을 서애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의 문하와 서애의 손자 류원지가 서애의 사후에 그의 유덕을 기리는 뜻에서 이 집을 지었다.
그 후 서애의 증손인 의하(宜河)가 확장 중수해 오늘에 이른다. 행랑채는 서애의 8대손 류상조(柳相祚)가 병조판서를 제수 받고 불시에 닥칠 군사들을 맞이하기 위해 며칠 사이에 서둘러 지었기 때문에 크게 정성을 들여 짓지 않았다고 한다.
사랑채는 정면 6칸과 측면 2칸으로 왼편 북쪽에 사랑방과 침방이 있고 중안에 사랑대청이 있다. 여기에 `충효당(忠孝堂)`이란 전서체의 편액(현판)이 있는데, 이것은 명필가?미수 허목(1595~1682)의 글씨이다.
사당채는 몸채와 방향을 달리하여 남향으로 놓여 있다. 정면이 3칸, 측면이 2칸으로 되어 있고 정면에는 삼문이 세워져 있다. 삼문은 대부, 공경의 집이 아니면 세우지 않는다. 그러나 이 사당에 봉사된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대광보국승록대부로 영의정을 지낸 서애 류성룡이기 때문에 세워졌다.
충효당 남쪽 사당 앞에는 문화재청에서 서애 기념관으로 세운 영모각이 있어 국보 132호 `징비록` 등 보물, 유품이 보존돼 있다.
◆북촌댁 200여년이 지난 지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북촌을 지키며 옛 모습 그대로 온전하게 자리잡고 있는 북촌댁.
이 집은 정조·순조대에 예조·호조 참판을 역임한 학서 류이좌(1763~1794)의 선고(先考) 지중추부사 류사춘 공이 1797년에 처음으로 작은사랑과 좌우익랑을 건립한 뒤, 1862년에 류사춘의 증손 석호 류도성이 안채, 큰사랑, 대문간, 사당을 건립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집의규모가 웅장하고 대갓집의 격식을 완벽하게 갖춰 사대부 가옥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화경당(和敬堂)은 이 집의 당호이며 `和`로 어버이를 섬기고 `敬`으로 임금을 섬긴다는 뜻이다.
중요민속자료 제122호로 지정돼 있는 하회마을. 이곳에는 두 가지 민속놀이가 전한다. 하나는 유명한 하회탈춤이고, 다른 하나는 줄불선유놀이다. 탈춤놀이가 탈을 쓰고 양반을 풍자하는 백성의 놀이라면, 줄불 선유놀이는 달 밝은 밤에 강물에 불꽃을 띄워 밝히고 배를 타고 즐기는 양반들의 놀이이다.
이종훈 기자leejonghoon0@naver.com 윤재철 기자chal201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