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는 경북도 북부에서도 서북쪽에 있다. 북쪽은 충북 단양, 동쪽은 봉화에 닿아 있고, 서쪽으로는 문경·예천과 나란히 한다. 태백산 줄기를 이어받은 영주에는 신라시대부터 절이 많이 들어섰다. 그 가운데 장엄한 가람배치를 하고 있는 부석사를 비롯해 비로사·성혈사·흑석사 등 아직 형세를 유지하는 절집들이 여기저기에 자리하고 있다.  또 가흥동이나 영주리, 이산면 신안리와 순흥 석교리에는 절을 잃어버린 석불상도 많다. 봉황산 자락에 화엄세계를 펼치려고 의상대사가 세운 부석사가 발길을 끈다. ◆부석사(浮石寺) 부석사는 사철 어느 때 가도 새로운 감회를 주는 명찰이자 경승지이다. 신라의 삼국통일기인 676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절이다. 당나라 종남산 화엄사에서 지엄을 스승으로 모시고 불도를 닦은 의상이 670년에 당나라가 신라를 침공한다는 소식을 전하려고 돌아온 뒤 다섯 해 동안 전국을 다니다가 마침내 수도처로 자리를 잡은 곳이다.  의상이 주석해 화엄사상을 닦고 수많은 제자를 길러내면서 부석사는 화엄 종찰로서 면모를 갖추게 됐다.  왕의 명을 받들어 지었다는 부석사. 매표소를 지나 경사 느린 길을 따라 은행나무 사이로 어느 정도 가면 `太白山 浮石寺(태백산 부석사)`라고 현판이 걸린 일주문이 나온다.  절로 오르는 길의 왼쪽에는 통일신라시대 유물인 당간지주가 서있다. 이곳에서 조금 더 오르면 천왕문을 만난다. 문을 지나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삼층석탑 한 쌍이 길 양옆으로 서있다. 통일신라 후기(9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 탑은 원래 부석사에 있던 것이 아니고 인근 동쪽 골짜기 옛 절터에서 1966년 옮겨 세운 것이다.  계속나아가면 범종루 아래로 길이 이어진다. 누각 밑으로 빠져나오면 안양루가 눈에 들어온다. 대석단(大石壇) 위에 있는 안양루의 `安養`은 극락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이곳까지 오르는 길은 멀고도 숨 가쁘다.   안양루를 지나면 바로 무량수전(無量壽殿)을 만나게 된다.  무량수전 앞에는 자태가 매우 단정한 석등이 자리하고, 왼쪽 뒤로 큰 바위돌이 비스듬히 얹혀있는 부석(浮石)이 있다. 돌이 떠 있는 절이라고 해서 `부석사`라고 이름 지었다. 이 바위에는 의상을 사랑하던 선묘아씨의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오른쪽 뒤편으로는 1칸짜리 작은 집이 있는데 선묘아씨를 모신 선묘각이다.  무량수전 마당에서 오른쪽 둔덕에 삼층석탑이 서 있고, 그 옆으로 나있는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면 의상대사를 모신 조사당이 있다. 조사당은 국보 제19호다. ◆무량수전 `無量壽殿` 현판은 고려 공민왕의 글씨이다. 무량수전은 현재 부석사의 주요 불전으로 아미타여래를 모시고 있다. 고려 중기의 건축이지만 우리 민족이 보존해온 목조건축물 중에서 가장 이름답고 오래된 건물이다. 1916년에 해체, 수리할 때에 발견한 서북쪽 기공포의 묵서에 따르면 고려 공민왕 7년(1358)에 왜구의 침노로 건물이 불타서 1376년에 원응국사가 고쳐지었다고 한다.  정면에서 보는 무량수전은 칸 사이가 비교적 넓은 다섯 칸에다 옆면은 세 칸이지만 기둥 앞쪽으로도 외목도리를 내 11량을 인 우람한 팔작지붕이다. 기둥위에만 포작이 있는 주심포집으로, 포작은 간결하면서도 공들여 가구를 짜나간 고려시대 장인정신을 볼 수 있는 주심포 방식의 대표적인 건물이다.  무량수전은 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이 알려지기까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국보 제18호로 지정돼 있다. ◆당간지주 보물 제255호인 부석사 당간지주는 통일시대 것으로 1m 간격으로 마주한 지주의 높이가 4.28m에 이른다. 위로 갈수록 조금씩 좁아지다가 끝을 단정하게 반원을 그리며 마무리 했고, 안쪽으로는 깃대를 맬 흠을 냈다. 부석사의 전성기에는 화엄종의 종찰임을 알리는 깃발이 이 지주 사이에 버텨선 당간위에서 휘날렸으리라고 생각해 본다. ◆안양루 안양루 밑을 지날 때에는 `안양문(安養門)`이라는 현판을 보며 지나게 되지만 위로 올라 누각에 오르면 `안양루(安養樓)라는 현판을 볼 수 있다.  안양루와 범종각은 모두 2층 누각으로, 경사가 급한 자리에 누각과 문의 기능을 겸해 지은 절묘한 건축물이다. 이 누각의 밑을 지나느라 머리를 조아리게 되므로 행동거지를 자연 조심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아미타여래좌상 아미타여래좌상은 흙을 빚어 만든 소조상인데 고려시대의 소조불로는 가장 큰 2.78m이며 국보 제45호이다. 딱 벌어진 어께에 건장한 체격으로 오른쪽 어께를 드러낸 우견편단 방식으로 옷을 입었다.  옷 주름은 굵으나 자연스럽게 흘러내려서 석굴암 보존불과 흡사한 균형미를 갖추고 있으며 손모양도 마귀를 물리친다는 뜻의 항마촉지인이다. 그래서 이 불상은 석굴암 보존불이 아미타여래상이냐 석가모니상이냐가 문제될 때에, 서쪽에 앉아 동쪽으로 바라보는 아미타여래상도 항마촉지인을 할 수 있다는 보기로 흔히 제시된다. ◆석등 무량수전 앞을 홀로 밝히는 이 석등은 높이가 2m7㎝나 될 정도로 높아 우러러 볼 수밖에 없다. 네 창 사이의 면에 볼록이 솟아나온 공양보살은 우리 눈높이 보다 훨씬 위에 있다.  사각의 대석 위에 여덟 잎 연꽃이 피어나는 모양으로 하대석을 조각했다. 꽃잎 끝마다 귀꽃이 힘차게 솟아오르는 모습은 9세기 석등이나 부도에 많이 볼 수 있다. 이 석등은 국보 제17호이다. ◆삼층석탑 보물 제249호인 이 삼층석탑은 높이 5.26m로 조사당 가는 언덕진 곳에 있어 올려다보게 된다. 2층 기단 위에 3층으로 쌓아 석가탑을 본뜬 전형적인 신라 탑이다. 하층기단이 넓어 안정감이 있어 보이는 반면, 지붕은 다소 무거운 느낌이다.  1960년에 해체, 수리할 때 3층 몸돌 중앙에서 사리공을 발견했지만 사리구는 없었고 기단부에서 철제탑, 불상조각, 구슬 등을 찾았다고 한다. 탑 앞에는 화사석을 잃어버린 석등이 있어 서로 한 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종훈 기자leejonghoon0@naver.com 류효환 기자ryuhh8080@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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