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N 여행- 전통문화의 고장 봉화 기행(3)
산이 깊고 물줄기를 따라 골도 많은 봉화. 이곳 길을 가다보면 군데군데 기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이 눈에 띈다. 그 가운데도 가평리의 계서당은 그 대표적인 양반가로 꼽힌다.
오랜 선비의 고장에는 오래된 한옥만큼이나 이야기가 많다. 한옥 처마 밑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정다운 가족처럼,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이야기를 듣는 아이처럼 우리 고장에서 전해져 오는 이야기를 듣는 것은 재미난 것이다. 계서당이 춘향전 이몽룡의 생가라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이곳을 찾는 발길이 늘어나고 있다. 이몽룡은 봉화의 실존인물 `성이성`이었을까(?) 의문을 품고 가평리로 떠나본다.
◆계서당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에 있는 계서당(중요민속문화재 제171호)은 조선 중기의 문신 계서 성이성(溪西 成以性 1595~1664)이 조선조 광해군 5년(1613)에 지었다고 전한다. 창녕성씨 계서공파 종택인 계서당은 정면 7칸 측면 6칸의 `ㅁ`자형 팔작지붕이고,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2칸 반이다.
영주시 동면 문단리 외가에서 출생한 성이성은 1627년(인조 5)에 문과에 급제한 후 다섯 고을의 수령(합천현감, 담양부사, 창원부사, 진주목사, 강계부사)을 지냈고, 어사를 네 번(경상도 진휼어사, 호서 암행어사, 호남 암행어사, 호남 암행어사 두 번)이나 등용됐을 정도로 청렴한 관리로 이름이 높았다.
계서당의 사랑채는 후에 넓히거나 다시 지은 것으로 추측된다. 아래쪽 마당 끝에 대문간 채를 두고, 그 북쪽 높은 곳에 사랑채와 안채가 하나로 연결돼 있다.
먼저 만나는 앞쪽의 대문채는 솟을대문으로 위엄을 갖추고 있다. 대문간을 들어서면 비교적 넓은 사랑마당이 있고 맞은편 높은 곳 서쪽에 중문간채. 동쪽에는 사랑채가 자리 잡았고, 사랑채 서쪽의 중문으로 들어서면 안채가 있다.
정면이 높직한 사랑채는 방이 남북으로 연이어 있는 겹집구조를 보인다. 전체로는 일곱 칸 반으로 아주 장엄한 위엄을 갖추었다.
경북 북부의 종가들이 이처럼 누마루가 특히 높은 것은 남방의 높은 마루형(高床型) 주거의 변형으로 보이지만 입지가 산기슭인 점을 보아 그보다는 지주들이 지방민을 다스리는 위엄을 갖추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앞쪽으로 반 칸짜리 퇴칸이 길게 나온 마루는 `┛`자 모양을 하고 있고 온돌방으로는 사랑방, 사랑웃방, 책방이 서편에서 동북편으로 꺾어진 모양의 재미있는 배치를 이루고 있다. 사랑채는 후대의 보수가 많은 편이다.
중문을 들어서면 마주하는 안채는 서쪽으로 2칸짜리 안방과 역시 2칸짜리로 벽체도 없이 넓게 트인 부엌이 연이어 길게 이어져 있다.
정면 4칸은 대청인데 그중의 반 칸은 안방의 도장방에 연이은 도장방으로 꾸며져 있어 특이하다. 도장방은 뒤주나 집기, 가구들을 두는 일종의 창고방을 말한다.
안채부분은 약간 변형은 되었지만 경북북부지방 `ㅁ`자 민가의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집으로 주택발달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대청마루 벽에는 `정중동(正中動)`과 `세심(洗心)`이라는 액자가 걸려있다. 이 글은 이 집의 가훈(家訓)으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중심을 잃지 말고 항상 자신을 올바르게 다스려야 한다는 교훈을 뜻한다고 한다. 그리고 동북쪽에 따로 담장을 둘러 사당을 배치했다.
◆계서당은 이몽룡의 생가였을까? 계서당은 `춘향전`에 등장하는 이도령의 생가라는 주장이 최근 제기되면서 이목이 집중되는 가옥이다.
연세대 설성경 교수가 지난 1999년 `이몽룡의 러브스토리`라는 주제의 연구 논문을 통해 성춘향과 이도령은 실존인물이라고 공식발표 했다. 설 교수는 `춘향전의 형성과 계통`, `춘향전 비교연구` 등의 저서를 내면서 `춘향전`에 대한 연구를 끊임없이 해왔다.
그는 성이성의 일기를 후손이 편집해 낸 `계서선생일고(溪西先生逸稿)`와 성이성의 4대손 성섭(成涉 1718~1788)이 지은 `필원산어(筆苑散語)`에서도 그 근거를 찾을 수 있었다고 했다.
KBS 1TV는 그해 12월 4일 역사스페셜에서 `이몽룡은 실존 인물이었다`는 내용으로 방영을 했다.
설 교수와 KBS는 계서당과 이도령과의 관련성을 이렇게 설명한다. 계서 성이성의 아버지 성안의가 남원부사로 있을 때 성이성은 아버지를 따라 남원에서 공부를 했고, 이후 과거에 급제한 뒤 암행어사에 네 번이나 등용돼 암행어사의 표본이 됐다. 그 뒤 성의성은 출사를 여러 번 거절한 뒤 봉화에서 이 계서당을 짓고 살았다는 것이다.
또 학자들과 종손의 말에 의하면 성이성이 암행어사로서 권선징악을 실천한 점 등에 미뤄 아버지 성의안의 친구가 `춘향전`을 만들었고, 계서당의 주인인 성이성이 바로 소설에 등장하는 이몽룡의 실제 인물이라는 것이다. 춘향전 집필 당시 양반의 실명을 바로 거론하기에는 시대 상황이 허락되지 않았기에 성을 이(李)씨로 바꾸고, 대신 춘향의 이름에 성(成)자 성씨를 붙였다는 주장이다.
`계서당이 이몽룡의 생가`라는 주장을 두고 심증은 가지만 사실여부를 가릴 확실한 증거가 없기에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이종훈 기자 leejonghoon0@naver,com 류효환 기자ryuhh8080@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