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는 산이 깊지만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아온 흔적이 있다. 봉화읍 도촌리, 물야면 개단리, 춘양면 의양리 등에는 고인돌이 많다. 삼한시대에는 영주·안동과 함께 진한 기저국 땅이었다. 이 지역은 고구려에서 신라로 불교가 전파되는 과정에서 많은 유적을 남겼다. 그 가운데 문수보살에서 이름을 딴 물야면 문수산(1,206m) 800m 중턱에 축서사가 자리하고, 그 아래쪽 북지리 지림사터에는 삼국통일기 신라불교의 모습을 보여주는 거대한 마애불이 새겨져 있다.
예부터 이곳에서 수행정진하면 한 가지 소원은 이뤄진다는 축서사. 그리고 마애불을 만나러 떠나본다.
◆천년 고찰 축서사(鷲棲寺)
축서사는 673년(신라 문무왕 13)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창건 설화에 의하면, 당시 인근 지림사의 주지가 산 쪽에서 상서로운 빛이 나는 것을 보고 의상에게 알렸다.
의상이 그곳으로 가보니 비로나자불이 광채를 발하고 있어 그 자리에 이 절을 짓고 불상을 모셨다고 한다. 867년(경문왕 7)에 부처 사리 10과를 가져와 사리탑을 조성했으며, 그 뒤 참선 수행 도량으로 번성해 오다가, 1705년(조선 숙종 31)에 중건했다.
당시 법당 등의 전각 6채와 광명루 및 승방 10여채가 있었고, 부속암자로 도솔암과 천수암 등이 있는 큰 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조 말기에 의병들의 무장봉기 기지 역할을 한다는 이유로 일제가 강제로 방화해 보광전 1채만 남고 전소됐다고 한다. 이후 한동안 폐사로 있다가 일제말기에 삼성각을 복원하고 요사 2채를 1957년과 1982년에 각각 신축하고 1996년 이후 무여(無如) 스님이 대가람 불사를 일으켜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다.
◆석조비로자나불과 목조광배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목조광배(보물 제995호)는 축서사 보광전에 모셔져 있지만, 원래부터 이곳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불상의 높이는 1.08m이며 얼굴은 가는 눈, 꼭 다문 입, 반듯하고 넓은 신체에서 고요함과 안정감이 느껴진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에는 주름이 평행 계단식으로 표현돼 다소 형식화 됐음을 알 수 있다. 무릎사이의 부채꼴 모양으로 넓게 퍼진 주름은 다른 불상들의 U자형과는 달리 물결무늬로 특이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이는 평행 계단식 옷 주름과 함께 9세기 후반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대좌는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한 8각으로 상·중·하대를 모두 갖추고 있다. 하대에는 각 면에 사자 1구씩을 새겼고, 중대에는 손을 모으고 있는 인물상을, 상대에는 꽃무늬를 새겨 넣었다.
현재 불상 뒤에 나무로 만들어진 광배가 있는데, 여기에는 화려한 꽃무늬와 불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것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고, 원래의 돌로 만든 광배는 윗부분만 남아있다.
이 불상은 통일신라 후기에 많이 만들어졌던 비로자나불 가운데 하나로, 대구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224호)과 동일한 특징을 보여줘 당시 조각수법과 신앙형태를 알 수 있다. 석탑기에 의해 9세기 후반에 만들었다는 절대연대가 밝혀져 통일신라 후기의 불상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괘불탱(보물 제1379호) 괘불탱이란, 사찰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그림을 말한다. 이 괘불탱은 모시바탕에 채색을 사용해 그린 그림으로, 정면을 향한 입불상을 화면에 가득 차도록 그린 다음 광배 주위로 화불과 보살상을 배치한 독존도형식이다. 원래는 보광전에 걸어두고 예배용으로 사용했다고 하나 지금은 대웅전에 보관 중이다. 주불은 얼굴 형태가 원만하며 사용된 색채 또한 선명하고 화려해 전반적으로 밝고 명랑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한편 괘불탱에 걸려있던 복장주머니에서 후령통(1구)을 비롯해 사리(2과)와 씨앗류, 다라니(4종 4매), 괘불원문(1매) 등이 발견됐다. 그림의 아래쪽 부분에 있는 기록과 조성내용을 밝혀주는 `괘불원문`에 의하면, 이 괘불탱은 조선 영조 44년(1768)에 정일스님 등 10명이 참여해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석등(石燈,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158호) 이 석등은 8각으로 등불을 밝혀주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에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아래받침돌에는 연꽃을 새겼는데, 꽃잎의 끝마다 작은 꽃조각이 달려있다. 그 위에 세운 가운데 기둥은 약간 짧은 편으로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을 이어주고 있다. 윗받침돌의 밑면에는 아래와 대칭되는 연꽃 조각을 두었다.
화사석은 네 곳에 창을 두어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했는데, 짧은 가운데 기둥에 비해 몸집이 커보여 전체적으로 무거운 느낌을 주고 있다. 심하게 부서진 지붕돌은 특별한 조각을 두지 않았고, 꼭대기에는 지붕을 축소한 듯한 머리장식을 올려놓았는데 여덟 귀퉁이마다 조그마한 꽃조각이 솟아 있다.
전체적인 구성이나 조각기법을 보아 고려시대 전기에 세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북지리 마애여래좌상 호랑이가 걸터앉은 것과 같은 형국이란 의미를 지닌 북지리 호거산(虎据山, 일명 호골산 虎骨山)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국보 제201호 북지리 마애여래좌상.
이 마애여래불은 자연암벽을 파서 불상이 들어앉을 거대한 방 모양을 만들고, 그 안에 높이 4.3m의 마애불좌상을 매우 도드라지게 조각했다. 네모진 얼굴에 고졸한 미소를 나타내고 있는 이 불상은 오른손을 가슴에 들어 시무외인(施無畏印)을 하고, 왼손은 무릎에 내려 여원인(與願印)을 짓고 있는 큼직한 두 손은 투박하면서도 위용을 보여준다.
이러한 특징은 넓은 무릎과 무릎을 덮어 내린 상현좌(裳懸座), 불상 주위에 새긴 화불(化佛)들과 함께 7세기 신라 전반기의 삼국시대 불상 양식을 나타내고 있지만, 얼굴이나 체구에 표현된 부드러운 조각 기법으로 보아 실제 제작연대는 7세기 후반기로 추정된다. 1947년 6월 수월암(水月庵, 현 지림사 智林寺) 부지 정리 중에 발견됐다.
이 불상은 영주 가흥동 삼존불좌상(보물 제221호)과 함께 이 시기 영주·봉화 일대 불상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신라 불교조각사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기고 있다.
이종훈 기자 leejonghoon@naver.com 류효환 기자ryuhh8080@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