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 줄기와 낙동강 상류를 끼고, 빼어난 산수와 천혜의 자연경관을 지닌 봉화 땅. 삼한시대에는 영주·안동과 함께 진한 기저국이었던 이곳은 고구려에서 신라로 불교가 전파되는 과정에서 여러 유적을 남겼다.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은 양반문화도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어떤 면에서는 안동보다도 봉화가 더 양반문화의 전통을 잘 간직하고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닭실의 안동 권씨 마을, 북지리 봉화 금씨 마을, 법전의 진주 강씨 마을, 해저리의 의성 김씨 마을, 오록의 풍산 김씨 마을 등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옛정을 느끼게 한다. ◆선비의 곧은 기개가 느껴지는 `닭실마을`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를 닭실마을이라고 부른다. 조금은 우스꽝스럽게 느껴지는 `닭실`이라는 이름은 풍수지리상으로 `금빛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金鷄胞卵形)`이라는 뜻에서 지어졌다. 충재종택과 청암정, 석천계곡으로 이어지는 닭실 마을 일대가 사적 및 명승 제3호로 지정돼 있다.  이곳은 `택리지(擇里志)`를 쓴 조선 중기 실학자 이중환(李重煥)이 경주 양동, 안동 내앞, 풍산 하회와 함께 삼남 4길지(三南 四吉地) 중 하나로 손꼽을 정도의 명당이다.  충재(沖齋) 권벌(1478~1548) 선생이 여기에 터를 잡은 뒤 안동권씨 후손들이 400~500년 동안 굳건히 지켜오고 있다.  권벌의 자는 중허, 호는 충재, 연산군 2년(1496)에 진사가 되고, 중중 2년 (1507) 문과에 급제해 대간, 정원과 각 조의 판서 등 여러 벼슬을 지냈다.  선생은 중종 14년(1519)의 기묘사화에 연류 돼 10여 년간 야인으로 있다가 14년 뒤인 1533년(중종 28년)에 다시 조정으로 소환 돼 벼슬이 우찬성까지 올랐다. 그러나 명종이 즉위하던 해에 또 다시 을사사화를 당해 평안도 삭주로 귀양 갔다가 명종 3년(1548)에 그곳에서 타계했다. 이후 선조 때 억울함이 풀어져 충정공(忠定公)의 시호가 내리고 영의정에 추종됐으며, 봉화 삼계서원에 모셔졌다. ◆선비들이 즐겨 찾던 청암정(靑巖亭) 닭실마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은 청암정(靑巖亭)이다. 이 청암정은 거북 모양의 너럭바위 위에 세운 정자로 인공호수를 조성하고 여기에 돌다리를 놓아 자연 풍광과도 잘 조화를 이루고 있기에 우리나라 정자 중에서 절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이곳에 들어서면 수령 오래된 나무들이 연못에 나뭇가지를 치렁치렁 늘어뜨린 모습에는 세월의 흔적이 역력함을 느끼게 된다.  충재 선생이 기묘사화(1519)에 연루돼 파직된 뒤 낙향해 1526년에 이 정자를 건립하고 10여 년간 기거했는데, 이 때 수많은 선비들이 찾았던 곳이다.  건축양식이 뛰어나고 문화재적 가치가 높으며, 퇴계 이황 등의 대학자들이 지은 글이 현판으로 남아있어 운치를 더하고 있다.  我公平昔抱深衷(충재공께서는 예전부터 깊은 뜻을 품었으나)/ 倚伏茫茫一電空(끊임없는 화와 복은 순간의 번개같이 공허하구나)/ 至今亭在奇巖上(지금껏 정자는 기이한 암석위에 있고)/ 依舊荷生古沼中(의구한 연꽃은 오래된 연못속에 있구나)/ 滿目煙雲懷素樂(눈에 가득한 구름에서 본래의 즐거움을 품고)/ 一廷蘭玉見遺風(뜰 안쪽에서 자라는 난에서 남겨진 풍취를 보네)生幾誤蒙知奬(못난 나는 공의 거두어줌에 힘입었는데)/ 魚+取白首吟詩意不窮(늙은 몸으로 읊은 시는 그 뜻을 다하지 못하구나)<퇴계 이황(退溪 李滉)이 지은 `靑巖亭題詠詩`중 일부> ◆충재박물관 충재박물관은 안동권씨 종가(宗家)에서 소장해오던 유물을 보관하고 전시하는 공간이다. 2007년 개관한 이 박물관에는 보물 482점과 기타 유물 등 모두 1만 여점에 이르는 조선시대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최근 들어 자손의 기증으로 인 해 소장유물의 수량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대표적인 유물로는 보물 제261호인 충재일기다. 이 일기는 충재선생이 서울에서 관직생활을 할 때 직접 기록한 친필일기로 한원일기 2책, 당후일기 1책, 승선시일기 2책, 신창령추단일기 1책 등 모두 6책이다.  또 보물 제262호로 지정된 근사록(近思錄)이 있다. 송나라 유학자인 섭채가 성리학의 기본이 되는 주돈이의 `태극도설`과 장재의 `서명` 등 중요한 문헌만을 골라 만든 성리학의 독본이다.  권벌이 애독해 늘 소매에 넣고 다녔다고 하며, 중종 때에는 경연에서 강의까지 하던 것이라고 한다.    이밖에도 종가 전적(宗家 典籍, 보물 제896호), 종가 고문서(宗家 古文書, 보물 제901호), 종가 유묵(宗家 遺墨, 보물 제902호) 등 많은 유물이 보존되고 있다. ◆석천정사(石川精舍) 봉화 문수산(1,206m)을 분수령으로 남서류하는 창평천과 닭실의 뒤에서 흘러내리는 동막천이 유곡 앞에서 합류해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석천계곡을 지나 내성천을 이룬다. 이곳 석천계곡에는 충재 선생의 큰 아들 청암 권동보(靑巖 權東輔)가 1535년에 지은 석천정사가 있다.  권벌이 동문 밖에 쌓았다는 대(臺) 위에 지은 건물이다. 정자라고는 하지만 전체 34칸의 큰 건물로, 학문과 수양을 목적으로 지었기 때문에 `정사(精舍)`로 이름 붙인 듯하다.  팔작지붕의 화사함으로 지은 건물은 자연지형을 최대한으로 살려, 자연과 조화하려는 뜻을 알 수 있다. 완전히 개방된 마루가 아니라 판장문을 쳐서 필요할 때는 공간을 폐쇄시키면서도 원할 때는 창문을 열어 밖과 소통할 수 있다. 또한 마루 구조에 달린 창문을 열면 그대로 계곡의 모습을 한눈에 담을 수 있어 그 효용성이 참으로 놀랍다.  정사 건물 뒤편 큰 바위 한 면에는 `석천정(石泉亭)` 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고, 좀 떨어진 곳에는 `청하동천(靑霞洞天)` 이라는 글씨도 새겨져 있다. 이는 충재의 5대손인 권두응의 글씨로 `신선이 사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이종훈 기자 leejonghoon.@naver.com 류효환 기자ryuhh8080@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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