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N여행-푸른자연 수놓는 시의 향연  문향으로 소문난 영양군을 둘러보는 기행 두 번째로 찾은 곳은 주실마을이다.  청록파 시인의 문학적 토양이 이곳 숲에서 배양됐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숲속에서 만나는 조지훈 선생의 맏형 조동진도 요절한 시인이다.  그의 시 `국화`는 또 다른 감동을 준다.  조지훈 선생의 문학과 삶이 고스란히 간직된 지훈문학관, 그리고 2008년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된 `지훈시(詩)공원`을 걸어본다. ◆조지훈 출생지 영양 주실마을  주실마을은 일월산 한 자락 끝에 자리한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이름의 `주(注)`자는 물을 댄다는 의미의 한자이고, 골짜기를 뜻하는 `실`은 순우리말이다. 주실은 `물을 대는 골짜기`, `물이 대어지는 골짜기` 정도로 풀이된다.  실제로 계곡의 양쪽 골짜기(용골, 논골, 성지골, 새미골, 감복골, 앞산골 등 크고 작은 골짜기)에서 물을 공급받고, 또 이를 밖으로 대주는 두 역할을 모두 하고 있다.  주실마을 주민들은 하늘에서 내려다 본 전경이 배 모양이라 하며 산골짜기가 서로 맞닿아 이뤄진 마을이라 해 `주실` 또는 `주곡(注谷)`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이 마을 입항조는 한양 조씨 13세인 조전(趙佺, 1576~1632)이며, 그의 자는 여수(汝壽), 호는 호은(壺隱)이다. 지금 주실마을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호은종택의 `호은`은 바로 조전을 가리킨다.  조전의 묘갈명에 따르면 그는 어린 시절부터 기개가 있었고 일찍이 무예에 힘썼으나 형제가 적다고 해서 무예를 그만뒀다고 한다.  또한 형인 조건(趙健)이 후사 없이 일찍 죽었기 때문에 홀로 가문을 이끌어가야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와 종형제들과 더불어 군량미를 조달하는 등 의병에 참가했다. 이 일로 관직을 재수 받았다. 조전이 이곳 매방산 기슭에 터를 닦은 것은 1629년이다.  그 뒤 한양 조씨 가문은 학문과 사환 그리고 영남 명문가와의 혼인을 통해 명문사족으로 성장했다. 조전은 1632년(인조 10)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 마을은 특히 시인 조지훈(趙芝薰, 1920~1968)의 생가가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조지훈(본명 조동탁 趙東卓)에 대해 좀 더 상세히 알고 나면, 1927년 신간회(新幹會) 활동을 했고 훗날 한의학의 기초를 닦은 그의 부친 조헌영(趙憲泳, 1899~1988)과 형이자 요절한 천재시인 세림(世林) 조동진(趙東振, 1917~1937)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주실마을이 오늘날과 같은 명망을 얻은 것이 조지훈과 그들 부자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산간오지에 자리한 작은 마을이 유명해진 것은 17세기 이래로 영명한 인물들이 끊임없이 배출됐기 때문이다.  조전의 증손인 호봉(壺峰) 조덕순(趙德純),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隣) 형제에 이르러서는 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해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그러나 조덕린이 붕당의 폐해와 노론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탄핵을 받는 바람에 더 이상 중앙으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비록 관계(官界)로의 진출은 막혔지만 학행과 도의가 뛰어난 인물을 많이 길러냈다.  이들을 이은 근대 시기의 인물로는 조승기(독립유공자, 의병항쟁), 조인석(애국계몽운동)과 근영·헌영·준영·애영 다섯 부자, 민족시인 조지훈이다. 또한 문집과 유고를 남긴 사람이 63인에 이른다.  주실마을은 실학자들과 교류로 일찍 개화한 마을이면서도 일제 강점기의 서슬 퍼런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개명을 하지 않았던 지조 있는 선비의 마을로도 이름이 나 있다. ◆호은종택 경북도 기념물 제78호인 호은종택은 조지훈과 그의 형 조세림이 태어난 곳이다. 주실마을 한복판에 있으며, 입항조 조전의 둘째아들 정형(廷珩)이 창건했다.  이 집은 경상도 북부지방의 전형적인 양반가의 모습을 하고 있는 `ㅁ`자형으로 정침과 대문채로 나눠진다. 정침은 정면 7칸, 측면 7칸이며 정면의 사랑채는 정자 형식으로 ?돼 있다. 솟을대문이 있는 대문채는 정면 5칸 측면1칸이다. 한국전쟁 당시 일부가 소실됐으나 1963년 복구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호은종택에 사는 조씨를 가리켜 칼날 같은 남인(南人) 집안이라고 해 검남(劍南)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이 집안의 체통을 지키기 위해 삼불차(三不借)의 체통을 철저히 지켜 내려왔다는 것이다. 三不借란 사람·글·재산을 다른 사람에게 빌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주실 한양 조씨는 조선 후기 200여 년 동안 정치적 핍박 속에서도 붓을 놓지 않았다. ◆옥천종택 경북도 민속자료 제42호인 옥천종택은 입향조 조전의 증손인 옥천 조덕린(1658~1737)의 고택으로 17세기 말경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덕린은 1671년(숙종 17)에 문과에 급제하고 교리(敎理)와 동부승지(同副承旨) 등을 역임했다.  이 집의 구조는 살림채인 정침과 글을 읽는 별당인 초당(草堂)과 가묘(家廟)인 사당(祠堂)으로 구성돼 있다. 살림채는 안동 지역을 중심으로 분포돼 있는 `ㅁ`자형 뜰 집의 전형적인 구성을 보이는데, 다만 안방이 동쪽에 오고 사랑방이 서쪽으로 배치된 점만이 다르다. ◆조지훈 1920년 영양 주실마을에서 출생한 조지훈은 `고풍의상`과 `승무` `봉황수`로 시단에 데뷔했다. 그 뒤 그는 소월과 영랑에서 비롯해 서정주와 유치환을 거쳐 청록파에 이르는 한국 현대시의 주류를 완성함으로써 20세기 전반기와 후반기의 한국문학사에 연속성을 부여해 준 큰 시인이다.  전통적인 운율과 선(禪)의 미학을 매우 현대적인 방법으로 결합한 것이 조지훈 시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청록집`, `풀잎단장`, `조지훈시선`, `역사앞에서`, `여운` 등 그가 남긴 시집들은 모두 민족어의 보석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특히 `승무`, `낙화`, `고사`와 같은 시들은 지금도 널리 읊어지고 있는 민족시의 명작들이다. ◆지훈문학관 지훈문학관은 청록파 시인이자 지조론의 학자 조지훈 선생을 기리기 위해 2007년에 건립했다. 이곳에는 전시실과 시청각실이 갖춰져 있다. 주요 전시물로는 지훈선생의 살아생전 유품과 육성녹음테이프, 시낭송테이프 등 다수가 전시돼 그의 사상과 철학, 문학세계를 체험할 수 있다. 이종훈 기자leejonghoon0@hanmail.net 김경원 기자kw293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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