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홍도야 우지마라경주가 낳은 동도명기 홍도 최계옥(1778~1822)을 기리는 추모비 제막식이 지난 16일 경주 금장대 오르기 전 소공원에서 거행됐다. 홍도가 죽음을 맞이한 30년 후 철종2년(1851) 경주의 풍류객 및 교방의 악공과 기생들이 묘비를 건립, 묘지를 관리해 왔다. 지역의 문인들도 1978년부터 홍도의 분묘임을 알고 벌초도 하고 술잔도 올렸다. 하지만 2005년 아파트 공사중 무연고 분묘로 행방이 모연해졌다. 이를 안타까이 여겨 경주의 문화예술인들이 홍도의 후학양성의 뜻을 기리고자 조철제 선생이 글을 짓고, 정수암 선생이 글을 쓰고 돌에다 새겨 경주시민 50여명이 자발적으로 재원을 마련해 추모비를 건립하게 됐다. 홍도 최계옥(1778~1822년)은 조선 정조 임금으로부터 홍도(紅桃)라는 별호를 받은 기생으로 `황진이`, `매창`과 더불어 그 이름을 크게 떨친 천재예술인이며 특히 후학양성에 전념한 인물이다. 최계옥은 본관이 경주로 호가 홍도, 자(字)는 초산월(楚山月)이다. 그의 아버지는 경주에 세를 떨쳤던 가선대부 최명동이며 어머니는 세습관기였다. 조선조 기생은 백정·장인·민중과 함께 낮은 신분에 속했다. 관가에 기적(妓籍)이 매어 있어 쉽게 벗어날 수 없는 종과 다름없는 신분이었다. 홍도는 머리가 명석하고 미모가 뛰어났다. 10세 때 시·서·화를 통달하고 음악과 춤에 능해 경주 교방 활동 당시인 20세때(정조 21년) 경주부윤 유한모의 천거로 상예원에 뽑혀 창경원으로 들어가 상궁이 된다. 최계옥의 노래와 춤은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이후 정조의 장인이자 순조임금의 외조부 박준원이 궁궐 연회석에서 최계옥의 독특한 가무를 보게된다. 박준원은 39년이란 나이차가 있었지만 사위인 정조에게 외부(外婦)로 허락해줄 것을 간청했고 당시 나이 59세로 상처한지 10여년이 지난 장인에게 정조임금은 소실로 삼도록 허락했다. 박준원의 소실이 돼 11년간 생활했고 남편이 죽은 다음 상례(喪禮)마치고 고향 경주로 내려와 궁궐에서 배우고 익힌 실력으로 13년 동안 후진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마침내 동도악부(東都樂府)의 사종(師宗)이 됐으나 1822년 병이 깊어지자 재산을 어려운 친척이나 이웃에게 나눠 주고 향년 45세의 일기로 생을 마쳤다. 경주군 향토사에는 현 법원 경주지청 부지에 교방사무소를 두고 현 감리교회 부지에는 관기양성소를 두어 운영했다고 돼 있는데 이곳은 조선시대 경주관아 안에 해당되는 곳이다. 그가 죽은 후 경주시 도지동 형제산 산18-7번지에 안장됐다. 30년이 지난 철종2년(1851) 경주의 풍류객 및 교방의 악공과 기생들이 묘비를 건립해 묘지를 관리한 이래 150여 년이 지난 2000년에 이르기까지도 경주 소재의 예술인들이 관리해오고 있었다. 홍도 무덤 발견당시 묘의 둘레 10m, 높이 2m정도로 일반 묘보다 2배 내외로 컸으며 화강암으로된 묘비는 높이 1.2m,너비 50㎝,두께 50㎝ 규모로 비의 허리가 반으로 갈라진 것을 시멘트로 접착시켜 놓은 상태였고 글자도 몇 개 부서졌다. 소리꾼 이상복(李尙福)이 비문을 짓고 전 검지(僉知)최남언이 388자 예서체로 정교하게 쓴 비문에는 당시 시·서·예에 능하고 절세가인이었던 홍도를 기리는 많은 풍류, 협객들이 홍도가 세상을 떠난 28년뒤인 1851년(철종2년)8월에 약간의 재물을 보아 석돌을 세워 무덤을 표시한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묘역 일대가 아파트 부지에 편입되면서 2005년 아파트를 시공하려던 시행자가 경주시에 무연분묘 개장신고를 하면서 이 비석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묘비는 소실되고 무덤은 무연고 분묘로 처리돼 2005년 11월 11일 납골시설에 봉안돼 왔는데 무연고 분묘의 납골 보관기간이 10년인 관계로 2014년 10월 25일 (사)신라문화진흥원에서 장례법의 행정절차에 따라 유연고 분묘로 이관해 현재 경주시 건천읍 영호추모공원에 임시적으로 안치돼 오고 있다. `동도명기홍도지묘(東都名技紅桃之墓)`란 여덟글자가 뚜렷이 새겨져 있던 홍도(紅桃) 비석의 행방이 묘연해지자 홍도의 무덤과 비석을 찾기 위해 지역 예술인들이 분노하고 일어섰다. 문화유산관련 기관과 단체 및 시민들이 뜻을 모아 지난 2014년 10월부터 기념사업을 추진· 이듬해 2월에 경주 예술의 전당에서 `홍도紅桃, 최계옥 기념 사업회`발기인 모임을 가졌다. 기념사업회는 고문으로 장윤익 동리목월기념사업회 회장, 이광오 경주박물관회 회장을 두고 자문, 감사, 사무, 홍보, 복원 등 30여명의 위원을 두고 있다. 홍도기념사업회는 뛰어난 예술인에 대한 예를 갖춰 제향하고 그의 후학양성에 대한 고귀한 뜻을 기리고, 후손들에게 그 뜻을 전달할 수 있는 문화공간이 필요하다는데 공감을 하고 문화유산관련 기관과 단체 및 시민들이 뜻을 모아 추모비를 건립하고 16일 제막식을 거행하게 됐다. 기념사업회는 향후 제례 및 묘역관리, 학술대회 및 기념사업을 통해 경주가 낳은 홍도 선생을 기리고 나아가 문화인물의 가치성을 확립하고 그에 대한 재평가 작업을 지속적으로 이뤄 나갈 계획이다. "조선 명기 홍도碑 찾고 무덤 복원 하라" 파워인터뷰 = 최용석 홍도기념사업회 위원장 최용석 한국예총 경주지부 회장(사진)이 홍도기념사업회 위원장을 맡아 홍도 최계옥을 기리는 사업을 총괄 진행하고 있다. 최 위원장은 도예가로 활동하며 지역 문화예술발전에 힘쓰고 있다. ▲홍도 최계옥은 어떤 인물인가 홍도 최계옥 선생은 경주가 자랑할만한 정신적 문화적 유산이다. 그는 어려운 삶 속에서도 경주의 악공과 후학들을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살았고, 짧은 45년의 삶을 마감 하면서, 자신의 전 재산을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전부를 내 놓은 훌륭한 예술인이었다. 이를 스토리텔링화 한다면 경주는 문화역사적으로 더 다양한 도시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대중가요의 홍도와는 동일 인물인가? 1930년대말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울분을 달래주던 `홍도야 울지마라 오빠가 있다` 대중가요와 연계성에 대해 궁금해 하는데 전혀 관계가 없는 인물이다. 선생은 생몰연대가 확실하고 선생의 업적이 명료한게 특징인데 미디어마다 흥미위주로 소개 하는 것은 기생이었다는 신분에 이야기를 얹은게 아닌가 생각한다. 조선조의 기생 홍도가 그 모델이기라도 한 것처럼 생각하는데 거리가 멀다. ▲홍도 추모비, 금장대 부근에 건립한 까닭은기념사업 장소는 원래 장소인 도지동 형제산 양지바른 곳에 모시는 곳이 바람직하나 추후 지속적으로 개발될 가능성이 높을 뿐만 아니라 일반 추모객들이 손쉽게 찾아갈 수 없는 곳으로 금장대 일원으로 하는 게 적합하다고 의견을 모았다. 또 금장대 일원은 경주 출신의 대표적인 문학가 김동리 선생의 무녀도의 배경지일 뿐만 아니라 애기청소 또는 예기청소(藝妓淸邵)라 전해져 내려오는 곳이고, 시민들을 비롯해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이라 이곳에 추모비를 건립하게 됐다. ▲홍도기념사업회의 앞으로 계획이라면 홍도 최계옥 선생에 대한 재평가 작업을 지속적으로 이뤄 나갈 계획이다. 전라도 부안에는 홍도와 같은 시대의 매창을 기리는 매창공원이 조성돼 매년 매창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홍도도 인근에 납골묘와 홍도공원, 묘비석 복원 등 여러 방안을 강구해야 마땅하다. 문화유산관련 기관과 단체뿐만 아니라 시민들도 뜻을 모아 기념사업회에 동참해 주기를 바란다. 김희동 기자press8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