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아침이다. 뭘 먹을까. 냉장고를 열었다. 오랜만에 소시지를 하나 구울까. 소시지를 꺼내어 칼집을 넣는데 주방 개수대 옆에 미끈하게 잘생긴 대파가 누워 있는 게 보인다.
오랜만에 대파도 구워 먹어야겠다. 아니, 대파만 먹으면 좀 그러니까 양송이도 몇 개 곁들이는 게 좋겠네. 마침 냉장고에 양송이가 두 개 남아 있었다. 그래서 대파와 양송이를 버터에 구웠다. 오렌지 주스와 소시지와 함께 먹으니 아침이 산뜻했다.
대파는 무슨 맛으로 먹나. 대파를 구울 때 향긋함이 코끝을 스친다. 씹을 때 아삭거리는 식감이 좋다. 살짝 단맛도 잡힌다. 아삭거리고 슴슴한 맛이 대파의 매력이다.
대파를 즐겨 먹는 나라는 어디인가? 한국을 제외하고 가장 먼저 떠오르는 나라는 스페인이다. 특정하면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이다. 조지 오웰의 `카탈루냐 찬가`와 FC 바르셀로나가 있는 그 카탈루냐다.
카탈루냐 지방의 바르셀로나에 가면 `칼솟타다`라는 대파구이 음식이 있다. 대파를 통째로 장작불에 새카맣게 구워 접시에 내놓는다. 대파는 카탈루냐 말로 칼솟이다. 대파를 통째로 석쇠에 구워 먹는 요리를 칼솟타다라 한다.
카탈루냐에서 칼솟타다로 특화된 도시가 발스(Valls)다. 지중해에서 멀지 않은 인구 2만5000명의 소도시. 세계 칼솟타다의 수도다. 칼솟타다 시즌이 오면 대파구이를 먹으려는 사람들로 발스 중심가 골목이 북적거린다.
대파처럼 한국인의 식탁에서 그 쓰임새가 다양한 식재료도 드물 것 같다. 육개장을 끓일 때 대파가 길쭉하게 들어가지 않으면 뭉근한 국물맛이 우러나지 않는다. 삼겹살을 구워 먹을 때 파무침은 없어서는 안 되는 한약방의 감초다.
동네 마트에 가면 대파 한 단에 2000원 정도 한다. 가끔 마트로 대파 심부름을 갈 때마다 스스로 묻곤 한다. 이렇게 대파를 싸게 사 먹어도 되나. 한번은 저녁 무렵 삐쭉 삐져나온 대파를 장바구니에 들고 걸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 적이 있다.
대파를 든 남자의 뒷모습을 보면서 한 시인을 생각한다. 백석(白石 1914~1996)이다. 5060세대 중에는 백석을 모르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도 그럴 것이 백석의 시가 교과서에 실리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들어서다. 중고교 시절 배운 적이 없으니 백석에 대한 친밀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MZ세대는 백석을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남신의주 유동 박씨봉방`, `모닥불` 등으로 기억하지만.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는 줄여서 `나나흰`이라고 한다. 이미 뮤지컬로도 나왔고 산울림 베이시스트 겸 가수 김창훈이 곡을 붙여 노래로 부르기도 했다. 눈을 감고 김창훈의 노래를 들으면 흰당나귀를 타고 눈이 푹푹 빠지는 가마리에 가 있는 것 같다.
백석의 고향은 평북 정주다. 일본 유학을 다녀와 1930년대 조선일보에서 기자로 근무했다. 조선일보 기자 시절 시집 `사슴`을 발표해 백석 신드롬을 일으켰다. 천재 예술가들의 특징 중의 하나가 `노마드`(nomad)다. `호모 노마드`(Homo Nomad). 천재들은 지루함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한곳에 오래 정착하질 못한다. 백석이 전형적인 `호모 노마드`였다.
안정적인 신문사를 그만두고 그는 방랑했다. 일본으로, 평양으로, 만주로. 만주 시절 먹고 살기 위해 별의별 직업을 거쳤다. 번역도 하고 세관 통역관도 하고 농사도 지었다.
신의주에서 압록강 건너 맞은편에 있는 중국 도시가 안동이다. 안동세관에서 잠시 통역관으로 일할 때 일본 시인 노리다케 가쓰오를 만났다. 그때 노리다케는 조선 근무가 두 번째였다. 이미 노리다케는 일본어로 번역된 백석의 시를 읽고 백석의 팬이 됐다.
1941년 두 사람은 신의주에서 처음 만났다. 언어의 장벽이 없고 마음이 통한 두 사람은 금방 문우(文友)가 돼 서로의 집을 방문하는 관계로 발전한다. 노리다케는 1942년에 나온 산문집 `압록강에서`에서 백석을 언급했다.
이렇게 이어지던 백석과의 인연은 북한이 공산화되면서 끊긴다. 백석이 김일성에 의해 숙청되고 이름이 더 이상 북한 매체에 등장하지 않자 노리다케는 걱정했다.
제발 아무 일도 없어야 하는데. 1960년대 노리다케는 백방으로 백석을 수소문했다. 그때 백석을 그리워하며 쓴 시가 `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