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발아래로 먼저 온다. 앙증맞은 풀꽃이 밭두렁과 돌 틈 사이에 소복이 앉아있다. 봄까치꽃, 노루귀, 복수초, 바람꽃…. 가만가만 허리를 숙여야 제 눈빛을 살며시 보여준다. 입춘이라고 하지만 제법 바람이 쌀쌀한데도 다투어 얄브스름한 얼굴을 내밀어 속살거린다.
나는 추위를 많이 탄다. 낼모레 이순이 다된 지금 예전보다 더 심해졌다. 뼛속까지 시리다. 그래서 봄이 더욱더 기다려진다. 겨우내 잠자던 빈 화분에서 흙을 밀고 올라오는 생명의 숨소리가 들린다. 물 한 모금 살포시 먹이고 도담도담 봄의 출산을 기다린다.
경주에서 감포 가는 길, 시부거리 계곡에는 해마다 변산바람꽃 따라 봄이 온다. 얼음 속 계곡은 봄 햇살 받아 재잘거리고 미세한 바람에 솜털 버들강아지 바르르 간지럼을 탄다. 생강나무꽃 노란 몽우리에 여린 햇살이 아지랑이로 피어난다. 바야흐로 봄이다.
해마다 이맘때면 바람꽃을 만나러 간다. 몇 해 전만 해도 계곡에 들어서면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는데 봉긋한 흙더미며 돌 틈을 꼼꼼히 살펴도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아마도 숨바꼭질로 애태우려는 속셈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다 들키기라도 하면 지나는 바람결에 하늘거리며 이름값을 한다.
통도사 영각 앞의 홍매화가 꽃망울을 달면 영락없는 봄이다. 잎사귀 하나 없이 벗은 가지마다 홍조로 꽃을 피우는 매화는 분명 봄의 전령사다. 고운 꽃들이 앞다투어 피려면 아직 이르지만, 입술을 오므리고 봄바람에 몸짓하는 홍매는 마음을 설레게 하기 충분하다.
봄은 계절의 여왕이면서 잔인하다고 한다. 튀밥 같은 벚꽃이 봄빛에 하얗게 나폴댈 때 지인의 소개로 만난 남편과 결혼을 했다. 적은 나이가 아니었는데도 사람 보는 눈이 어설펐다. 사람을 계절로 표현한다면 남편은 여름 한중간쯤이었다. 무논의 개구리처럼 어디로 튈지 가늠이 되지 않는 사람. 여기저기 무람없이 저지레를 하는 바람에 뒷수습에 부심했다. 이제 막 꽃대를 올리려던 내 삶의 꽃밭은 긴 장마와 폭풍에 파헤쳐지고 뿌리까지 드러날 지경이었다. 서른 해 동안 나름대로 쌓아 놓은 나의 성은 산들바람에도 헤쳐지고 깃발은 너덜거렸다.
봄꽃은 물오른 가지에 잎보다 먼저 와서 조각보 같은 기억을 틔운다. 한여름 심술을 부리던 풍파도 혹한의 매서운 칼바람도 견디어 낸 봄. 끄집어 내지르지 못한 목 안의 울음이 잎보다 붉은 꽃으로 먼저 오는 게 아닐까. 봄꽃은 맞서려 하지 않는다. 저를 시샘하는 추위가 찾아오면 고운 숨 몰아쉬고 꽃비로 내려앉는다. 잎을 기다리고 꽃자루에 열매를 담은 채.
꽃차를 좋아해서 봄이면 꽃으로 차를 만든다. 노란 알갱이 몽글몽글한 생강나무꽃과 진달래, 매화 등 봄꽃은 독성이 없고 향이 순해 꽃차로 만들기에 적당하다. 산에 올라 꽃을 채취하고 다듬고 덖음을 반복하다 보면 하루해가 짧다. 꽃차로 완성된 목련꽃을 유리 다관에 넣고 우려내면 노란색의 봄으로 다시 피어난다. 고운 색과 향이 좋은 꽃차는 봄이 주는 선물이다.
봄바람이 불면 식탁에도 봄이 온다. 봄의 식탁은 초록이다. 새콤달콤한 초고추장에 참기름 쪼르륵 넣고 버무린 햇미나리, 얇실한 달래 듬뿍 썰어 넣고 만든 짭조름한 달래장, 심심하게 무친 봄동 겉절이, 냉이 한 움큼 넣은 두부 된장국이 끓으면 봄의 향기에 침샘이 돋는다. 겨우내 김장김치며 묵은 나물에 입맛을 잃었던 식구들이 아삭아삭한 봄 향기를 먹는다. 봄은 생명의 기력을 북돋우는 발전의 계절이다.
짝이 된 남자와 같이한 서른 해의 봄이 산비탈로 지나갔다. 한여름 격랑 같았던 남편은 환갑을 맞았다. 불통으로 레일 위를 폭주하던 남편이 서서히 플랫폼으로 들어서며 속도를 늦추고 걸어온다. 그와 걸어온 길을 되짚어본다. 험한 길 재우치며 함께 걷느라 뼈대만 남은 가슴에 이제 막 새봄이 숨을 틔운다. 따스해진 봄기운 덕분일까. 봄꽃 소복한 화분을 들고 걸어오는 남편 뒤로 푸른 아지랑이가 아른거린다.
햇살 가득한 창가에 앉아 다이어리를 펼친다. 한 해 계획을 세우고 제2의 봄을 맞아 버킷리스트를 적어본다. 이제 남편에 대한 마음이 명주바람에 묻어오는 봄 향기처럼 편해졌다. 내 마음에도 그와 함께하는 # 하나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