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팔자에 역마살이 끼면 이사를 자주 다닌다고 한다. 나도 그렇게 역마살이 낀 모양이다. 숱한 이사를 하고 여러 곳에서 살다 지금은 경주에 안착했다. 부초처럼 떠돌며 살아온 지난날을 돌이켜본다.  나는 원래 대구 토박이다. 부모 양계에서 모두 임진왜란 무렵부터 대구에 살아왔다. 여기에서 쭉 살다 18세가 돼 서울로 대학 유학을 떠났으니 가장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를 서울에서 모두 보낸 셈이다. 나중에 판사로 서울지역에서 근무하다 1988년에 경주지원으로 발령 받았다. 개인 사정으로 분황사에 기거했는데 심한 우울증으로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그러다 한국 법관으로서는 처음으로 일본에 파견돼 동경에서 살았다. 이때의 경험은 내 인생에 아주 색다른 시각을 제공해줬다. 귀국 후 대구 법원으로 옮겼다가 항명 파동을 일으키며 법관직에서 축출됐다. 그것이 1993년 여름이다.  그 당시만 해도 판사로 재직하다가 변호사 개업을 하면 전관예우라는 것을 받아 20∼30억원은 쉽게 번다고 했다. 나는 이를 포기하며 왜 그런 무모한 짓을 했을까. 많은 사람들이 나의 행위에 의문을 가진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당시에는 진학할 대학을 성적에 따라 학교에서 정해줬다. "그걸 말이라고?"하는 이가 있겠으나 사실이다. 그렇게 나는 법과대학에 들어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어린 내 의식에 법이라는 것은 세상의 강자들 이익을 옹호하기 위한 교활한 장치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너무 강렬했다. 그 생각이 떠나질 않으니 법서를 읽을 수 없었다. 없는 돈을 긁어 막걸리를 마시고 얼큰하게 취하지 않으면 책을 꺼내놓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오직 연로한 부모님을 생각하며 고시공부를 한답시고 했으나 그 공부는 나에게 엄청난 고통 자체였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내가 엉뚱하게 항명해 법관직에서 쫓겨나는 일을 자초한 행위가 조금은 이해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법관재임명탈락 조치가 너무 과하다는 말이 사법부 내부에서 일었고 다시 법관으로 재임명된다는 말이 있어 그해 여름과 가을, 겨울을 계속 기다렸으나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또 나 자신이 다시 법관으로 일하는 것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엄동설한에 겨우 걸음을 걷는 어린 딸과 아들의 손을 잡고 경주로 왔다. 아이들의 외가가 있는 곳이기도 한 경주로 내려오며 여기서 뼈를 묻을 때까지 다시는 다른 곳으로 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변호사를 할 처음에는 대법원장과 싸우고 법원을 나온 사람이라는 말이 떠돌며 누구도 나에게 사건을 맡기지 않았다. 경주경찰서에서는 수시로 내 사무실을 찾아와 동향 체크를 했다. 그러다 판사와 검사들 사이에서 나에 대한 동정론이 일고 또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대구와 경북 지역을 통틀어 단순히 사건수임 건수로 친다면 랭킹 1위의 변호사가 됐다.  변호사를 5년 정도 하다 효성가톨릭 대학에서 법학교수로 초빙하기에 이에 응했고 또 이어서 경북대학이 로스쿨 창설을 준비하며 창설요원의 한 사람으로 나를 선발했다. 서울 소재 유수의 대학에서도 초청을 받았으나 경주에서의 삶을 중히 여기며 거절했다. 그런데 대학교수가 되니 서울에 갈 일이 많아졌다. 더욱이 2007년에 한국헌법학회의 회장으로 선출된 이후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서울에 가야 했다. 부득이 대구에 전셋집을 얻어 이사했으나 경주집은 그대로 뒀다. 대학교수 생활을 하며 미국과 중국에 잠시 다녀왔다.  2018년 20년 남짓의 대학교수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경주로 내려왔다. 길게 지속되던 역마살이 그제서야 끝났다. 이곳에서 변호사로 조금씩 사건을 처리하고 농사일을 한다. 매일 일찍 일어나 집 옆의 밭에서 땀이 흐르도록 노동을 하는데 이것이 주는 충일감은 대단하다. 또 이곳저곳 들어오는 원고청탁을 받아 글을 쓴다. 인터넷 세상이 돼 시골에 살아도 거의 불편함 없이 세상과 소통한다. 무엇보다 부드러운 곡선의 경주 산하가 빚어내는 독특한 분위기에 흠뻑 젖을 수 있는 것이 기쁘다.  노자가 말한 부쟁이선승(不爭而善勝, 다투지 않는데도 잘 이긴다는 말로 `노자도덕경` 73장에 나온다)의 삶을 꿈꾼다. 남과 다투는 일 없이 좋은 삶을 사는 것이다. 떠돌이 생활을 끝내고 경주에서 이렇게 한가로이 사는 것에 하루에도 몇 번씩 감사하는 마음이다. 이리를 둘러봐도 저리를 둘러봐도 곳곳에 감사해야 할 덩어리가 눈에 띈다. 모두 경주와의 인연에서 생긴 것들이다. 환하게 비치는 축복의 빛을 늙은 몸 안으로 깊숙이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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