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겨울과 기승을 부리던 꽃샘추위도 지나고 어느새 새싹이 돋아나 개나리, 벚꽃 등 화사한 봄꽃이 가득한 4월이 됐다.
지금 거리는 따스한 볕과 푸르른 녹음을 즐기며 봄을 느끼는 사람들로 가득하지만 106년 전 이때 상하이에서는 활짝 핀 봄꽃보다 더 찬란한 독립을 향한 소망이 피어났다.
지난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문 발표와 함께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전국에서 울려 퍼졌고 이를 계기로 우리 민족의 독립에 대한 염원은 더욱 강렬해졌다.
이후 자주독립을 위해 체계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할 필요성을 느낀 독립운동가들은 같은 해 4월 11일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임시정부는 국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인 `민주공화국`을 천명했으며 국민의 자유권과 평등권을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등 하나의 독립운동 단체가 아닌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정부로서의 역할을 국내외에 선포했다.
임시정부는 설립 이후 일제의 갖은 억압 속에서도 군사, 외교, 교육 등 여러 분야를 아우르며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육군무관학교를 설립해 무관 양성에 힘썼고 한인애국단을 조직해 이봉창·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지원하는 등 수많은 항일독립투쟁을 벌였다.
지난 1940년에는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고 미국 전략첩보국(OSS)과 함께 국내 진입 작전을 추진하는 등 연합국과 공동작전을 벌이기도 했다.
특히 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해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고 여러 나라에 외교사절단을 파견하는 등 국제사회에 독립운동의 당위성을 알리고 세계 각국으로부터 정부 승인을 얻기 위한 외교활동에 힘썼다.
또한 교민 등을 대상으로 민족 교육을 실시하고 독립신문을 발간하는 등 국민을 위한 교육, 문화 등 다양한 사업도 추진했다.
이로 인해 임시정부는 일제의 강력한 보복과 탄압을 겪어야만 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목숨을 잃고 다치는 등 희생이 뒤따랐다.
하지만 임시정부 요인들은 난징, 광저우, 충칭 등 수차례 중국 대륙 내에서 청사를 이동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펼쳤고 마침내 우리는 꿈에 그리던 광복을 맞았다.
이처럼 광복은 저절로 얻어진 것이 아니며 우리 민족의 끊임없는 투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치열했던 독립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단순히 과거의 유산이 아닌 일제에 항거한 민족적 의지를 상징하며오늘날 대한민국의 초석이라 할 수 있다.
선조들이 간절히 바라던 광복, 그 80주년을 맞는 특별한 해에 조국의 자유를 위해 평생을 헌신한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고 그 정신을 현재와 미래로 이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