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 학문과 사상의 흐름이 그 시대 문화를 지배하듯이 명대의 강력한 중앙 집권의 무관 중심 사회는 송대의 지적이고 우아한, 풍요로운 회화 흐름을 시대에 흡수되면서 미약하게 됐다.
영락제 시기에 지리적으로 중부와 먼 북경에 도읍이 건립됐다.
북쪽 이민족 침입에 긴장 상태가 계속 이어졌다.
명대 인재 선출을 보면 복잡한 형식으로 이뤄진 팔고문(八股文)의 과거제도는 사의적 의견이나 창의적 학문을 떨칠 수 없었다.
선발된 관리들은 보수적이고 엄격한 규율의 정치제도에 따랐다.
환관의 관리하에 궁정 화원 화가들은 계급과 대우가 높았으나 엄격한 복종의 의무는 창의적 예술 활동에 커다란 걸림돌이 됐다.
명의 황제들이 그림을 선호해 궁내에 그림들이 장식됐다.
황제 취향의 원체화(院體畵)풍과 역사, 고사, 행락도 등 외에 화조화와 외래 식물 유입에 따른 화조 등과 함께 사군자가 조화롭게 그려진 그림들이 등장하게 된다.
명대는 정치적, 환경적 영향으로 궁정 화원 화가와 자유로운 생활의 문인화가가 분명하게 구분되는 시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