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해 선생은 1927년생이니 돌아가신 아버지보다 2살이 많고 지금 92세로 살아 계신 어머니보다 4살이 많다. 그러니 선생은 96세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대략 나에게 큰 아버지뻘 정도 되는데 신기하게도 지금까지 그런 느낌이 든 적이 한 번도 없다. 친구나 형님 같다. 나뿐이 아니다. `전국노래자랑`에서 젊은 아낙네도 송해 선생을 오라버니라고 거침없이 부른다. 이런 느낌이 드는 건 선생이 권위를 내세우기보다는 자기를 낮추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송해 선생은 가수다. 북에서 음악전문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했고 창공악극단에서 노래를 불렀다. 생애 12장의 앨범을 발표했다. 1967년에는 돌아가는 삼각지, 안개낀 장충단 공원을 부른 배호와 함께 첫 가요 음반을 발매했다. 노래에 대한 사랑은 이어져 2018년에는 `딴따라` 음반으로 국내 최고령 음반 발매 기록을 세웠고 1년 뒤에 앨범을 또 내어 기록을 갱신했다. 그렇지만 인기가수는 아니었다. 삼각지와 장충단 공원을 지나다 보면 배호가 떠오르지만 송해 선생은 애석하게도 사람들이 애창하는 히트송은 없었다.
코미디언이었고 영화와 TV에도 출연했다. 당시 `웃으면 복이 와요`는 온 가족이 모여 앉아 보는 프로였다. 서영춘, 구봉서, 배삼룡 등은 온 국민을 뒤집어 놓은 레전드였다. 하지만 어릴 때 서영춘, 구봉서, 배삼룡은 많이 봐서 기억에 각인돼 있는데 송해 선생은 다른 사람과 콤비를 이뤄 만담하는 것 정도 기억에 어렴풋이 남아 있다. 선생은 코미디언의 레전드에는 끼지 못했던 것이다. 1963년에는 영화 `YMS 504의 수병`에 단역으로 출연했지만 이것조차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자세히 보기선생은 인기 있는 라디오 진행자였다. 교통 라디오 방송에서 `가로수를 누비며`라는 프로그램을 1972년부터 1989년까지 17년간 진행했다. 하지만 진행 14년째에 외아들이 한남대교에서 교통사고로 숨지는 바람에 방송활동을 잠시 중단했다가 3년 뒤에는 완전히 하차했다. 교통 방송에서 `안전 운전 하세요`라는 멘트를 도저히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모처럼 적성에 맞아 인기를 누렸지만 불의의 사고로 그만 두게 된 것이다.
교통방송을 하차하던 때가 62세였다. 그 때까지 송해 선생의 삶은 화려했지만 그늘이 있는 삶이었다. 젊어서 월남해 고향을 떠나왔고 잠시 이별인가 했는데 어머니와는 영영 이별이었다. `복희는 웁니다!`라고 외쳤던 그 복희가 송해의 본명이다. 앨범을 냈지만 히트친 게 없어서 선생을 가수로 알고 있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코미디언도 했지만 서영춘, 구봉서, 배삼룡의 그늘에서 레전드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다. 만담을 잘 하는 사람 정도였다고 할까. 그 만담을 이어가 `가로수를 누비며`에서 인기를 얻던 차에 외아들을 잃는 사고를 당해 스스로 그만 뒀다. 많은 재주가 있었지만 1등을 하는 재주는 하늘이 주지 않았다.
인생 후반부 출발도 화려하지는 않았다. 당시 저조한 시청률을 기록하던 `전국노래자랑` 사회를 맡은 정도였다. 아들을 잃은 슬픔이 있던 차에 `그냥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바람이나 쐬보시라`는 PD의 제안을 받아 들여 시작했다. 그 때가 우리나라 나이 61세, 환갑이었다. 라디오도 아니고 TV에서 환갑의 나이에 MC 자리를 맡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전국노래자랑` 시청률이 워낙 낮았기에 시도해볼만한 일이었다.
선생도 받아 들이기 쉽지 않았으리라. 명색이 성악을 전공하고 앨범을 계속 낸 가수인데 시골을 돌아다니며 할머니 할아버지 노래 자랑 하는 데 사회를 봐야 하다니. 가수가 시골 노래자랑 마당에 나가 사회를 본다는 것은 자존심이 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수락했다. 세월이 흐르고 보니 이 프로그램이 송해 선생의 인생을 활짝 꽃피우게 했다. 각 분야의 1등은 하지 못하면서 여러 재주를 가진 게 `노래자랑`프로에서 빛을 내기 시작했다. 악극단에 있다 보니 반주도 잘 알고 가수이다 보니 누구보다 노래를 잘 알기에 가끔씩 출연자들을 거들어주기도 했다. 만담 실력이 있으니 지방을 돌아다니며 예기치 않은 출연자들을 만날 때 기지를 발휘했다. 키가 작고 잘 생기지 않은 외모가 사람들을 편하게 해줬다. 그리하여 `전국노래자랑`프로를 밑바닥에서 최장수 인기 프로로 끌어올려 이제 다들 그 프로의 MC가 되고 싶어한다.
선생은 인생의 후반에 접어들면서 자신이 평생 갈고 닦았던 재주를 한 단계 낮춰 적용했다. 젊은 사람들이 가고 싶어 경쟁하는 자리가 아닌 낮은 자리로 갔다. 1등의 재주는 아니었지만 여러 재주가 융합돼 그게 오히려 빛을 발했다. 성경에 `자기를 낮추는 자가 높아지리라`는 말이 꼭 이러한 듯하다.
송해 선생은 죽을 때까지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하겠다고 했는데 그 말을 지킨 셈이다. 길게 보면 1955년 창공악극단으로 데뷔한 이래 2022년 사망할 때까지 평생 현역이었다. 61세에 후반전을 시작해 35년을 뛰었다.
여기에는 자신이 젊을 때 닦은 재주를 한 단계 낮은 곳에 활용하려 했고 나이 들어서도 권위를 내세우기보다 한결같이 자기를 낮추는 지혜가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