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두 종류의 작가가 있다. 모국어로 글을 쓰는 사람과 외국어로 글을 쓰는 사람. 전자가 절대다수다. 영어 외에도 외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사람들이 있다. 언어 습득에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조차도 글을 쓸 때는 대개 모국어로 쓴다. 말하는 것과 글 쓰는 것은 다른 영역이어서다.  2006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오르한 파묵(1952~)이 최신작 `페스트의 밤`을 발표했다. 그는 터키 이스탄불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건축학과 저널리즘을 공부했다. 2006년부터 주로 뉴욕에 살며 컬럼비아대학에서 비교문학을 강의한다. 대학에서는 물론 영어로 강연한다. 하지만 작품을 쓸 때는 터키어로 쓴다. `바늘로 우물 파기`라는 평가 받는 세밀화 같은 그의 문학은 모국어로 직조해낸 것이다.  의사학술대회에서 `천재와 함께 떠나는 프라하 여행`을 강연한 적이 있다. 강연 중에 이런 질문을 던졌다. "배우 추송웅이 `빨간 피터의 고백`을 명동 삼일로 창고극장에서 장기 공연한 적이 있는데 혹시 이 연극을 본 사람이 있나?". 그러자 60대 의사가 손을 들었다. 그는 수련의 시절 그 연극을 보게 된 경위를 설명하면서 뜻밖의 이야기를 했다. 자신은 오랫동안 프란츠 카프카를 독일 작가로 알고 있었다고. 프란츠 카프카(1883~1924)는 어찌해서 독일 작가로 잘못 입력됐을까.  그는 프라하 구시가 한복판에서 태어나 반경 1km 안에서 평생을 살았다. 시간적으로 보면 오스트리아 제국 시절 생(生)을 받아 제국이 해체되고 탄생한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때 눈을 감았다.  사람의 생애에는 시대적 배경이 수목의 나이테처럼 또렷하게 박인다. 유대인이었던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는 십대에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천신만고 끝에 구시가 한복판에 번듯한 잡화상을 열었다. 헤르만이 태어났을 때 오스트리아 제국의 위용은 막강했다. 가진 것 배운 것 없이 맨주먹으로 살아남아야 했던 헤르만은 체득했다. 목에 힘을 주고 살려면 제국의 관료가 돼야 한다.  헤르만은 아들이 태어나자 모든 걸 오스트리아화(化)하기로 결심한다. 아들 이름을 오스트리아제국 황제의 이름을 따 독일식 프란츠(Franz)라고 지었다. 초등학교부터 독일계 학교를 보냈다. 초등학교를 마치자 상류층 자제들이 다니는 독일어 왕립김나지움에 진학한다. 그리고 프라하대학을 거쳐 산업재해보험공단 공무원이 된다.  그는 집에서는 체코어를 사용했지만 학교에서는 독일어로 말하고 썼다. 1924년 죽을 때까지 그는 몇 작품만을 독일어로 발표했을 뿐이다. 프라하에서 그를 소설가로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때 번역가 밀레나 예잔스카가 등장한다. 밀레나는 독일어로 쓰인 카프카의 작품을 체코어로 최초로 번역한다. 카프카가 작가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친구 막스 브로트가 그의 사후 미발표 원고를 모아 책으로 출간하면서부터.  하지만 1948년 체코가 공산화되면서 작품들은 곧바로 금서(禁書)로 묶인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그의 소설에 `퇴폐적`이라는 빨간 딱지를 붙였다. 미국, 영국, 프랑스, 한국 등 자유 세계에서는 자유롭게 읽혔지만 정작 체코에서는 불온한 작품으로 여겨졌다. 이런 과정에서 `독일 작가`라는 오해가 생겼다.  매년 가을 노벨상 시즌이 되면 무라카미 하루키와 함께 문학상 후보에 오르내리곤 하는 밀란 쿤데라(1929~). 쿤데라는 체코어와 프랑스어로 글을 쓴 작가다. 쿤데라가 태어난 해를 기억해두자. 뉴욕에서 증시가 폭락하면서 대공황이 시작된 해다. 대공황의 쓰나미가 세계를 덮치자 공산주의 세력이 우후죽순처럼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브르노 출신인 쿤데라는 1948년 열아홉 살에 체코 수도 프라하로 온다. 열아홉, 혁명과 사랑에 맹목적인 나이 아닌가. 열아홉 청년은 체코슬로바키아가 공산화되는 과정을 지켜보았고 그들의 현란한 수사(修辭)에 열광했다. 열혈 공산당원이 되었다. 대학생 쿤데라는 공산주의를 찬미하는 시를 잇달아 썼다.  그러나 개인주의적 기질을 타고난 그는 전체주의 조직 문화에 맞지 않았다. 이후 여러 차례 출당과 복당을 반복한다. 대학을 졸업한 뒤 국립영화학교(FAMU) 조교가 된다. 1960년대 들어 그는 시를 접고 희곡에 뛰어들었다. 다시 희곡과 평론을 주유하다 마침내 소설에 닻을 내린다.  1967년 첫 소설 `농담`이 나왔다. 프랑스어로 번역되면서 그의 문명(文名)이 비로소 자유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이 벌어지자 그는 극작가 바츨라프 하벨과 함께 민주화운동에 가담한다. 하지만 `프라하의 봄`이 소련제 탱크의 캐터필러에 짓밟힌 후 그는 완전히 삭제된다. 도서관과 서점에서 그의 책들이 사라졌고 출판이 금지된다. 작가에게 사형선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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