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지명은 기억되지 않고 낙인처럼 새겨진다. 찾아가는 길, 머물던 장소, 그곳에서 일어난 일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가 일순 살아나 활개 친다. 흡사 제멋대로 칼집에서 빠져나온 검처럼 심장을 날카롭게 긋고 지나간다. 이 칼날의 이름을 알고 있다. 깊고 먼 그리움이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가는 굽이진 산길을 한참 올라간 곳에 당신은 누워 있었다. 간혹 일어나고 간혹 걸었지만 댓돌 아래로 내려오는 일은 없었다. 생전 당신의 유일한 취미는 낡은 등산화를 신고 산에 가는 일이었다. 엄마의 도시락을 배낭에 넣어 대문을 나서는 당신의 걸음은 홀홀 가벼웠다. 그랬던 당신은 어느 사이 이토록 깊은 병이 들었는가. 이제 문 밖에 생생한 산을 두고 바라볼 뿐이었다. 입춘 치고도 해가 좋았던 날, 당신은 밖에 나가보고 싶구나라고 말했다. 다섯 발짝 걸어 차양 아래 낡은 의자에 앉아 아이같이 웃던 당신을, 당신의 늙은 어깨를 생각한다.
희망은 두물머리에 피어오르는 물안개처럼 희미하게 찾아왔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곤 했다. 공허한 자리에 낙담이 짙게 배었다. 겨울의 끄트머리였다.
나는 지인이 내어준 산등성이 반듯한 통나무집에 당신을 모셔놓고 시외버스로 팔당대교를 달려 출퇴근했다. 내가 출근한 통나무집은 나의 형제가 지켰다. 우리가 슬픔과 애달픔을 나눠가지면서 서로의 그늘이 되어주는 사이 바람의 결이 바뀌어갔다. 매일 저녁 나의 낙담을 당신이 눈치챌까봐 동백꽃잎 물고 날으는 동박새처럼 쉴 새 없이 봄소식을 실어 날랐다. 당신은 모르는 세상 이야기인 양 입을 꼭 잠그고 듣고만 있었다.
어느 날은 통나무집 근처에 매화가 핀 것을 보았다. 내 가슴이 쉴 새 없이 뛰었다. 물러설 수 없이, 기어이 봄이 오고 있다는 사실이 하늘에서 날아온 낭보 같았다. 언 가지를 깨고 꽃눈을 틔워 피어난 고아한 자태를 당신이 꼭 보았으면 싶었었다. 앙상한 가지에 앉아있는 풍성한 꽃봉오리들에 감탄하느라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이 꽃이 마저 피어서 폭죽처럼 터지면 당신을 휠체어에 태워와 보여주리라 다짐했다.
출근길 버스에선 밀린 잠을 보충하느라 혼곤한 졸음이 밀려오곤 했다. 앞좌석에 정수리를 박으며 자다가 깬 어느 아침. 버스는 마침 팔당대교를 지나고 있었다. 온전히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올리다가 강가에서 노니는 청둥오리 한 무리를 보았다. 어미와 새끼 여섯 마리였다. 강에도 봄물이 드는 구나. 나는 다시 희망으로 벅차올랐다. 당신의 육신은 밤새 허리를 접어놓고 말을 잃게 하고 다만 끝을 향해 시들어 가는데 나는 자꾸 회생의 근거를 찾아댔다. 물색없는 희망타령의 말미에는 날선 자책이 찾아들었다. 봄은 오면 뭐하나. 당신의 시간은 끝나가고 있는데.
2월에서 3월로 넘어가는 간절기를 얼마동안은 견디지 못했다. 유명산 자락의 통나무집 남쪽 방에 누워 당신은 말했다. 꽃을 많이 보거라 찾아온 봄을 무색하게 말아라. 한 줌 햇살에 아이처럼 웃던 당신의 마지막 봄이었다.
당신 돌아가시고 한동안 봄이 올 기미가 오면 몸서리가 났다. 온 몸에 바늘이 돋는 것처럼 아프던 세월이 지나고 이제는 기척 없이 찾아오는 그리움의 칼로 마음을 베인다.
당신의 시간 속에서 아이에서 어른으로 여문 나는 십수년째 당신이 없는 계절을 맞는다. 당신의 부재가 아무리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처럼 아무리 눈을 흘겨도 무참한 봄은 온다. 하여 올해도 온몸에 봄 냄새를 그득 묻히고 당신을 만나러 간다.
저어기, 바람이 봄을 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