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광풍과 비를 몰고 와 동네를 스산하게 만들어 버렸다. 몇몇 남은 관광객은 감옥에 갇힌 듯 삼삼오오 모여 동네 마실가듯 이리저리 다닌다. 섬을 삼킬듯한 파도는 점점 낮아져 여객선이 예정시간을 넘겨 자신들을 태우러 들어온다는 희망에 터미널로 향하지만, 오전도 지나지 않아 결항 소식에 허탈해진 이들은 모두 떠난 터미널 아래 구석에서 한참을 큰 소리로 얘기하다 사라졌다.■ 길과 길로 이어진 독도 전망대 가는 길 태풍은 여름을 끌고 가버렸다. 한순간 쇠를 녹일 듯 뜨겁던 계절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가을이다. 매미 소리는 잦아들고 그 자리를 귀뚜라미가 어둠의 고요를 깨고 찢어지라고 소리를 낸다. 여름과 가을이 교차하는 이때, 물 한 병 손에 들고 가벼운 걸음으로 걷기 좋은 길이 있다. 울릉도 길이 그렇듯 오르막 아니면 내리막이다. 갔다 다시 돌아오는 코스다. 걸어 본 길 중 가장 가파른 걷기가 있는 곳이다. 누구는 원숭이처럼 네 발로 걸어 올라야 하는 길이라고도 한다. 그만큼 오르막 경사가 힘겹다. 도동 한복판, 파출소 위, 체육관 곁에 입구가 있다. 주택가 마을이다. 차근차근 오르면 교육청도 보이고 호박엿 공장도 있고 문화원도 보인다. 향나무 냄새 흘러나오는 가게를 엎어질 듯 지나면 거대한 불상이 길 한쪽을 채우고 있는 절도 보인다. 아직 오르막은 끝이 아니다. 거대한 돌 판을 땅에 꽂아 놓은듯한 건물이 오른편 시야를 채운다. 독도 박물관이다. 그곳으로 향하는 탑처럼 보이는 구조물이 엘리베이터다. 그대로 오른다. 길은 갈라져 박물관으로 향하는 길과 약수터로 향하는 길이 구분된다.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박물관과 향토 사료관이 있다. 그 위에는 독도 전망대로 향하는 케이블카 시설이 있다. 돌계단을 올라 약수터로 간다. 돌계단 몇 개를 오르면 마당처럼 곱게 차려진 휴식공간이다. 청마 유치환의 `울릉도` 시비(詩碑)도 보이고 공덕비들도 보인다. 모두 세월을 지켜낸 역사의 흔적들이다. 차근차근 역사와 세월의 숨소리를 들어본다. 지금 걷는, 올라가는, 이 길은 독도 전망대로 가는 산길이다. 대부분 여행객은 약수터를 거쳐 박물관을 보고 케이블카를 타고 전망대를 오른다.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와 둘러보지 못한 곳을 들렀다 내려가는 길을 택한다. 아쉽다. 오늘 걷기는 그 관광코스 같은 길을 피해 산속으로 타고 오른다. 정해진 코스를 벗어나 너른 정원 같은 휴식공간을 지나 도랑을 끼고 또 다른 돌계단을 오른다. 계단 옆 도랑 바닥의 색이 황톳빛이다. 오랜 세월 약수터에서 흘러나온 물이 만들어 놓은 흔적이다. 약수터가 보인다. 물 흘러 내린 곳 바닥 색도 황토색이다. 호기심에 한 모금 마신다. 맛이 이상하다. 아주 옛날 왜군과 싸우던 장군이 죽자 그 장군의 갑옷을 여기에 묻었다 한다. 지금 그 갑옷의 쇳물이 삭아 내려오는 물이 이 약수라 전해진다. 허무맹랑한 전설 같은 이야기지만 물맛을 보면 그럴듯한 이야기다. 과학적으로 철분, 마그네슘, 염소, 탄산이온 등의 성분이 함유되어 있다고 한다. 약수터 인근에 수질검사표를 보면 분명하다. 한때 관절에 좋다 하여 많이 마셨다고 한다. 지금은 그저 추억으로 한 모금 마시는 정도로 기억을 유지하고 있다. 가만히 지켜보면 처음 그 물을 마시는 사람은 대부분 뱉어낸다. 그들이 생각했던 청량하고 달콤한 약수가 아니다. 쓰고 텁텁하다. 쇠 맛이 난다. 옆에서 지켜보던 동료가 한마디 거든다. "만병통치약이래, 마셔!" 억지로 마신 그들의 표정에는 의심이 가득하다. 어릴 적 `약수탕`이라 부르던 이곳을 이른 아침 등교 전, 효도라는 부추김에 작은 통 하나 챙겨 들고 눈 비비며 올라와 한 통 받아가면 칭찬받았다. 이 물은 어린 우리에게 음료수였다. 또래들과 설탕보다 300배 이상 단맛을 낸다는 사카린의 일종인 `뉴슈가`나 `신화당`을 그 물에 타서 마시며 알싸한 사이다 맛을 대신 하기도 했다. 약수터 오른쪽으로 조그마한 길이 보인다. 돌담을 지나 오르면 숲길이 나타난다. 구불구불 짙은 숲 향 풍기는 길은 그리 길지 않다. 짧은 길을 굽이굽이 돌아 올라가는 동안 숲은 달콤하고 알 수 없는 상쾌함을 내어준다. 아까시나무와 동백나무가 즐비하다. 다른 곳 동백나무는 나지막하고 옆으로 크게 자라는데 이곳 동백나무는 하늘을 찌른다. 미끈하게 뻗어 올라간 나무는 아래 흙을 비옥하게 한다. 숲길은 10여 분 정도 거리로 짧다. 이내 시원한 풍경을 내보인다. 바다 쪽으로 보면 도동항이 조그맣게 보이고 뒤로는 산으로 오르는 길이 보인다. 안내판을 잘 보고 아래로 향하지 말고 산 쪽으로 난 길을 따라 오른다. 오늘 걷기는 거창한 이름으로 불리는 길이 아니다. 남들과 다른 울릉도 속 길을 걸어보라 권하는 길이다. 좀체 걸어 볼 수 없는 길이다. 주민들만 알음알음 길을 다져놓고 즐기는 곳이다. 동네 마실 가듯 걷는 길이다. 대부분 여행객은 독도전망대를 오른다. 거친 숨소리를 내며 가파른 오르막을 지나 케이블카를 타고 전망대에 오른다. 하지만 좀 더 힘을 쏟으면 몸속으로 평생 지워지지 않을 진득한 숲 냄새와 오지 않았으면 보지 못했을 그윽한 풍경들이 수시로 시야에 가득 채우는 그야말로 진국 풍경이 가득한 길을 걸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왕복 약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길은 그리 어렵지 않다. 오르막이지만 수시로 보이는 울릉도 속 모습은 관광코스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모습이다. 작은 오솔길 너비의 길을 걸어올라 시야가 트일 때쯤 건물이 나타난다. 건물을 끼고 돌아 나와 아래로 향하지 말고 왼쪽 위로 올라가면 기상대가 나온다. 기상대 앞을 지나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사동 해안이 파노라마처럼 덮쳐온다. 그 길을 따라 차를 타고, 배를 타고 돌아봤으리라 짐작한다. 그 바다 옆, 산 쪽으로 시선을 옮기면 사동마을이 군데군데 보인다. 산 중턱 마을도 보이고 산 아래 바닷가 마을도 보인다. 울릉도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간다. 천천히 소나무 숲으로 들어간다. 왼쪽은 도동이고 그 너머는 저동마을이다. 오른쪽은 사동마을이다. 그렇다. 지금 걷는 이곳은 도동과 사동의 경계다. 이 길 끝에 독도 전망대가 있다. 잘 정비된 오솔길 중간중간 빼곡한 나무들 사이로 이 마을 저 마을 풍경들이 액자처럼 잘 짜여 나타난다. 작은 풍경 사진 전시장 같다. 걷다 보면 전망대 건물이 보인다. 길은 좁다. 천천히 걸어 들어가면 케이블카 시설 건물 마당이 나오면 오늘의 걷기 절반이 끝이 난다. 천천히 건물 옆을 지나 계단을 오른다. 계단을 오르면 아래서 멀리 보이던 작은 전망대가 눈앞에 있고 그 위에 올라서면 도동 마을이 한눈에 담기 힘들만큼의 크기로 다가온다. 독도전망대다. 독도를 가장 조망하기 좋은 위치에 있어 수많은 여행객이 빼놓지 않고 오가는 곳이다. 마치 이곳을 지나치면 애국자가 아닌 듯 그렇게 흘러간다. 사실 이곳에서 독도를 본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일 년 동안 매일 다녀도 그 중 겨우 오십여 일 정도 겨우 독도에 눈도장 찍을 수 있다고 한다. 울릉도 어느 곳, 이 정도 고도에 올라서면 독도는 보인다. 단지, 하늘이 허락하고 내 몸이 그 위치에 있어야만 그 너그러운 애국의 숨소리를 낼 수 있다. 독도는 울릉도 동남쪽 87.4km 떨어진 곳에 있다. 일본이 독도를 울릉도에서 맨눈으로 볼 수 없다는 근거를 내세워 자국영토라 했다. 웃긴다. 삼대(三代)가 덕을 쌓아야 맨눈으로 보인다는 독도, 해발 340m 망향봉 정상의 독도 전망대에는 일 년에 적어도 50여 일가량은 삼대가 덕을 쌓은 사람들이 왔다 간다. 그들은 웃는다. 그냥 그들 주장이 웃긴다며 손사래 치며 두 번 생각 않는다 한다.■ 내려오면서 만나는 나라사랑의 마음 내려다보면 이곳 사람들의 삶의 짜임새가 보일 것이다. 구렁을 따라 바다로 이어진 마을, 촘촘히 박혀있는 형형색색의 집들, 그사이를 구분 짓는 실타래 같은 길들. 이제 운이 좋다면, 삼대가 덕을 쌓고 바다를 펄펄 끓게 할 만큼 가슴 가득 애국심이 넘친다면 보일 것이다. 아니면 마음 한구석 그냥 울릉도 왔으니 독도 전망대 정도는 가봐야겠지라는 맘으로 올라 독도를 한눈에 담았다면 앞으로 가문의 영광이고 삼대 동안 자랑거리로 남을 것이다. 건넛산을 보면 지난번에 걸어 본 저동 옛길의 출발지였던 행남 가는 길이 보일 것이다. 길 위에서는 보이지 않던 산과 계곡의 깊이가 느껴질 것이다. 그 산과 계곡을 넘나들며 걸었다. 걷기는 쉬웠으나 내려다본 산세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돌아내려 와 건물 아래로 난 길을 따라 바다 쪽으로 향한다. 그 아래 또 다른 절경이 기다리고 있고 길은 왕복 30분 정도로 그리 멀지 않다. 삼나무 숲이 기다리고 있고 그 끝에는 바위 위 작은 정자가 있다. 색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해안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진정한 울릉도의 모습이다. 이제 돌아 내려가면 된다. 역사의 한쪽을 지켰고 그 증거를 가슴에 새기며 일상으로 돌아가 자연의 순리인 듯 독도를 자랑할 것이다. 내려와 지나쳤던 독도박물관을 들러 울릉도 역사의 증거들을 확인하고 희미하게 자리 잡고 있던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것에 대한 확신 없던 맹신을 확신으로 바꾸어 갈 좋은 기회일 듯하다. 역사의 흔적들이 확인시켜줄 것이다. 또 다른 건물에는 울릉도 주민들의 생활상이 전시된 향토 사료관이 있다. 재미있다. 흥미로운 소재들과 이야기들이 많다. 오늘 걷기는 독도와 울릉도 주민들의 삶 그리고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삶의 터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걷기였다. 그리 길지 않은 왕복 1시간 30여 분 동안 물 한 병 들고 타박타박 뒷동산 오르듯 능선을 따라 걸어 오르고 내리며 이곳 삶의 터전을 보고 역사를 챙길 수 있다. 울릉도의 텁텁한 삶의 흔적을 보며 진득한 숲의 향기를 몸속으로 들이는 걷기는 이제 이곳 옛사람들이 살아가며 걸었던 길을 탐미한다. 세월에 지쳐 풀이 우거지고, 흔적은 사라져 가는 길을 따라 숨소리 깊게 또 다른 두 발을 움직여 본다. 임정은 기자05479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