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는 어느 계절이나 찾아도 아름다운 곳이다. 경주라는 이름만으로도 고향 어디 대숲을 걸어가는 듯 머릿속이 맑아진다. 잘 닦여진 길들은 곱게 빗은 가르마처럼, 거미가 줄을 뻗어 얽어 놓은 것처럼 가지런히 짜여 있어 마음이 절로 정갈해진다. 그러나 그 속내를 모두 들여다보는 데는 만만치 않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보여줄 듯 다 보여주지 않고 안으로 감춰 둔 은밀한 곳이 더 많은 때문이다. 골품제의 낡은 틀에 갇혀 날개를 펴지 못한 유학자, 불운의 시대를 살아야 했던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그가 남긴 경주지역의 유적지를 따라가본다. 천년 역사를 이어온 왕조는 전 세계적으로 드물다. 그리고 그 왕조가 껴안고 있는 역사와 인물과 사람이 전해 주는 이야기는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대서사시이다.  최치원은 통일신라 후기의 학자로, 12세 되던 경문왕 8년(868)에 당나라로 유학하여 18세에 과거급제 한 후 벼슬길에 올랐다.  헌강왕 11년(885)에 귀국하여 진성여왕에게 시무10조(時務十條)를 올리는 등 어지러운 국정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으며, 노년에는 가야산, 지리산 등 명산에 은둔하며 지내다가 가야산 해인사에서 생을 마쳤다. 뛰어난 문장가이기도 한 그는 많은 저서와 비문을 남겼는데, 특히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은 신라화랑도를 설명해 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현재 최치원 선생과 관련된 대표적 유적으로는 경주에 상서장·독서당·초월산대숭복사비가 있고, 해운대에는 해운정, 창원(마산 합포구)에 월영대·고운대와 합천에 농산정·홍류동, 함양에 학사루·상림숲, 군산에는 옥구향교·자천대가 서산에는 부성사·서광사, 문경에 지증대사적조탑비 등 전국적으로는 최치원 선생 관련 유적이 300여 곳 이상 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임금님께 글 올린 상서장 상서장은 경주 남산 왕정골 남쪽에 있으며 1984년 5월 21일 경상북도기념물 제46호로 지정되어 최치원유적보존회에서 소유, 관리하고 있다.  신라 말엽의 뛰어난 문필가 최치원이 머무르면서 공부하던 곳이라 전한다. 상서장 오르는 길은 예순아홉 개의 계단 끝 정문과 관리인이 거처하고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길이 있다. 돌담 끝 작은 쪽문에 빗장이 걸려 있다. 시간의 저쪽으로 들어가는 자물쇠 같은 낡은 빗장을 풀었다.  한 쪽 발을 들여 놓으려 하자 파란 앉은뱅이 풀꽃이 빤히 올려다보고 있어 흠칫 놀란다. 삐그덕 공기 중에 거친 울음을 한번 쏟아 내고 문이 열린다. 분칠하지 않은 상서장이 민얼굴로 서있다. 그는 이곳에서 사양길에 접어든 신라의 국운을 쇄신하는 경륜을 담은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를 진성여왕에게 바쳤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상서장이라는 이름은 이 집에서 왕에게 상서를 올렸다는 데서 유래한 듯하다. 또한, 왕건(王建)이 개국할 것을 짐작하고 상서하기를 `계림황엽곡령청송(鷄林黃葉鵠嶺靑松)`이라 하였다. 신라가 망하고 송도(松都)가 흥한다는 이 글을 보고 왕은 크게 노하였고, 최치원은 이후 해인사와 경주 남산 등에 숨어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현재 영정각 3칸, 상서장 5칸, 추모문 3칸, 수호실 3칸으로 구성된 와가 3동으로 되어 있으며, 1874년(고종 11)에 건립된 비가 있다. 지금은 최치원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  다른 문화재와 달리 상서장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의 힘 같은 게 있다. 임금에게 아부하여 자신의 출세를 추구하기보단 힘없고 나약한 백성을 택한 지식인의 고뇌와 당차고 결연한 의지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봉건주의 시대에는 제대로 된 언로가 차단되어 있었고 또한 임금에게 불경한 죄로 자칫하면 반역죄로 몰릴 위기에 처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최치원은 위민의 정신으로 국가와 백성들의 평안을 위해 그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간언을 한 것이다. 그런 그의 정신이야말로 우리가 영구히 보전해야할 무형의 문화재가 아닐까.어린 최치원 학문 닦던 독서당독서당은 낭산 서쪽 자락 끝 경주시 배반동에 있는 최치원 선생께서 어린 시절 공부한 서당이다. 대학자의 높은 학문을 헤아리기 힘들 듯 독서당을 찾아가는 길에도 여러번 고민을 하게 한다.  배반네거리 굴다리 지나 서라벌대로 오른쪽 산자락에 낡은 고택인 독서당이 보인다.  경주 시민들도 잘 찾지 않는 곳이다. 배반동 사거리에서 보문입구 사거리까지의 7번국도 4차선 도로는 대형화물차들이 무섭게 달리는 곳인데다 주변에 차를 주차 할 곳은 물론 갓길까지 없는 형편이라 주차공간을 찾기가 힘들다. 배반 지하차도가 끝나는 곳에 한 두 대 정도 차를 세월 둘 곳이 있기는 하나 역시 진입이 어렵다.  이곳에서 2km 정도 떨어진 진평왕릉 주차장에 차를 세워 두고 산책 겸 독서당까지 걷는 것이 편하다. 추수를 끝낸 들판에는 가을이 익어가고 있다.  청청한 푸른 대숲에 빙 둘러 쌓인 독서당 계단을 오른다. 바람의 문양이 저 억겹의 댓잎에 부딪쳐 저들끼리 몸을 부비며 일제히 깨어나 소리를 낸다. 선비의 절개를 나타낸다는 대나무, 한동안 사람손이 닿지 않은 낡은 기와와 이끼에서 오래전 신라의 대 학자의 숨결을 느낀다. 독서당은 정면 4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신라 말기의 학자  최치원(崔致遠)이 학문을 닦던 곳이라고 전하나 이후 여러 차례 보수가 이루어져 본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낮은 시멘트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툇마루 앞쪽으로 원형기둥을 세웠는데 중복된 보수의 영향으로 초석의 형태가 일관되지 않고 다양하다. 1850년(철종 1) 건립된 최치원유허비가 건물 왼쪽 비각 안에 놓여 있으며 담장 밖에 최치원이 심었다고 전하는 향나무가 있다. 선현의 뜻 기리는 서악서원서악서원은 경주 서악동에 있으며 무열왕릉과 도봉서당 가까운 곳에 있다. 조선 명종 때 문신인 이정(1512∼1571)이 경주부윤이라는 벼슬을 지낼 때 지방 유림과 뜻을 같이해 명종 18년(1563)에 김유신 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으로 이후에 신라 학자인 설총, 최치원의 위패도 같이 모시게 됐다.  선도산 아래에 `서악정사`로 세운 것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됐고 1602년 묘우, 1610년 강당과 동·서재를 새로 지었다. 인조 원년(1623)에 국가가 인정한 서악서원으로 `서악`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폐쇄되지 않고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경내에는 위패를 모신 묘우와 교육 장소인 동시에 유림의 회합 장소로 사용하던 조설헌이라는 강당과, 동재·서재로 유생들의 숙식 장소로 사용하던 시습당과 절차헌, 제사 음식을 준비하던 전사청 그리고 영귀루라는 누각이 조성돼 있다. `서악서원`이라는 현판은 당시 명필인 원진해(元振海)가 쓴 것이다. 현재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해마다 2월과 8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요즘에는 서원에서 선비문화체험과 화랑체험을 진행하고 있다.  어린이에서 어른까지 참여가 가능하며 가까운 태종무열왕릉, 서악고분걷기와 다도, 생활예법 등을 체험할 수 있다.  문화재를 보호하고 보존하면서 선현들의 뜻을 기릴 수 있는 장소로 제공되고 있다. 숭복사지 초월산대숭복사비숭복사지는 경주에서 울산 방면 말방리라는 토함산 기슭에 있다. 숭복사의 원래 이름은 곡사(鵠寺)였다 한다. 곡사를 지은이는 파진찬 김원량인데, 그는 원성왕의 어머니 소문왕후의 외삼촌이자, 원성왕비 소문왕후의 외할아버지지요. 원성왕이 돌아가자 곡사에 능을 조성하고, 절을 지금의 숭복사지로 옮겼다 한다. 그 뒤 경문왕이 꿈에 원성왕을 보고 절을 크게 수리한 뒤 능침사찰로 삼았다.  최치원이 비문을 지은 대숭복사 비가 있었던 곳으로 지금은 동탑과 서탑만 남아있다.  지금 비는 지난 해 2014년 2월 필사본으로 전해오던 비문을 교감하고 행렬을 맞추어 새로 조성한 것이다. 글씨는 하동 쌍계사에 있는 `진감선사대공탑비` 글자를 모아 새겼다 한다. 비석의 전체 높이는 381cm 이다. 초월산대숭복사비는 최치원이 왕명으로 신라 왕실 사찰이었던 대숭복사의 유래를 기록한 것으로 인정과 효례, 유불의 상통성, 풍수설, 동인(東人)의식을 담고 있다. 헌강왕11년(885년)부터 시작해 진성여왕때 완성했다.  `초월산대숭복사비`의 비명(碑銘)은 최치원이 지은 `사산비명(四山碑銘)` 중 하나로 `사산비명`은 서산 휴정 스님의 제자인 해안(海眼, 1567~?) 스님이 `고운집`에서 네 비문을 뽑아 엮은 데서 유래한 것으로 `숭엄산성주사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명(崇嚴山聖住寺大朗慧和尙白月光塔碑銘)`, `지리산쌍계사진감선사대공령탑비명(智異山雙溪寺眞鑑禪師大空靈塔碑銘)`, `초월산대숭복사비명(初月山大崇福寺碑)`, `희양산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명(曦陽山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銘)`을 통칭하는 용어이다.  사산비명은 신라말 고려초 불교와 역사, 문화, 정치, 사상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대숭복사비`는 임진왜란 때 절과 함께 파괴돼 귀부와 비석 조각 몇 개만 남아있다.  귀부는 국립경주박물관에, 비석 조각은 동국대학교 박물관과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다.    김희동 기자press8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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