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한-중 정상회담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최치원의 시`범해(泛海)`를 인용하며 1000년 전 선생과의 인연을 불러냄으로써 최치원선생이 한-중 우호와 문화교류의 아이콘으로 새롭게 부활하고 있다. 2016년 중국인 한국방문의 해를 대비해 중국 관광객 유치 등 최치원 인문관광 도시연합 협의회 도시들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가운데 한류문화콘텐츠로 부활한 `고운 최치원 선생`의 발자취를 경상투데이가 새롭게 조명한다. 편집자 주신라 대학자 최치원을 콘텐츠로 한류문화 개척 8개 지자체 최치원 유적지 `고운 트레일` 조성 한국 문화의 본류이자 글로벌 문화융성도시를 선도하는 경주시가 21세기 새로운 문화한류, 한·중 인문관광의 길을 개척하다. 경주시에서는 지난 7월 23일 알천홀에서 `고운` 최치원 선생 관련 유적을 보유하고 있는 부산 해운대구, 창원시, 합천군, 함양군, 군산시, 서산시, 문경시 등 8개 시·군·구 자치단체와 함께 `고운 최치원 인문관광 도시연합 협의회` 출범식을 가졌다. 출범식에는 최양식 경주시장을 비롯한 7개 자치단체장 및 관계공무원 등 200여명이 참석해 각 지자체 간 상호업무 협약을 체결하고 협의회칙 제정과 협의회장 및 부회장 등 임원을 선출했다. 본 협의회는 전국에 산재된 최치원 선생과 관련된 유적을 토대로 시·군·구 상호 교류를 통해 미래 지향적인 협력방안을 모색하고, 최치원 선생에 대한 역사적 유적과 정신을 집대성 하여 문화융성 도시로 상생 발전하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출범식에 초대회장으로 선출된 최양식 경주시장은 "중국인들로부터 칭송 받는 `고운` 최치원 선생의 유적유물 등을 통해 한국문화의 우수성을 알리고 중국 관광객 유치 등 대륙을 넘는 새로운 국가 관광산업의 모티브를 구축하는데 협의회가 앞장서 추진하고 이를 위해 회원도시 모두가 공동 노력하여 줄 것"을 당부했다. 최치원 유적지를 트레일 형태의 관광지로 꾸미자는 취지로 기획된 `고운 트레일`(가칭)만 하더라도 총 8개 시·군 18개 유적지가 있다. 경주시(상서장·독서당·서악서원)→문경시(야유암·지증대사적조탑비)→서산시(부성사·서광사)→군산시(문창서원·자천대)→함양군(학사루·상림)→합천군(농산정·홍류동)→창원시(월영대·고운대·두곡영당)→해운대구(해운정·최치원 동상)로 이어지는 코스다. 충남 보령시와 홍성군도 가입을 희망하고 있어 모두 모이면 `최치원 도시연합`은 10개 지자체협의회로 확대될 전망이다. 이렇게 전국에 흩어져 있는 관련 유적지만 300여곳에 달한다. 대부분 제대로 된 관리를 받지 못한 채 방치됐다고 한다. 지난 7월 경주시에서 협의체 결정을 협의해놓고 진전이 없었는데, 오는 22일 합천에서 다시 만나 실무협의회를 진행할 예정이다. 김희동 기자press88@hanmail.net최지원 作`계원필경` 중 秋夜雨中(추야우중)秋夜雨中(추야우중)가을밤 내리는 빗속에秋風唯苦吟(추풍유고음) 가을바람에 이렇게 힘들여 읊고 있건만世路少知音(세로소지음) 세상 어디에도 날 알아주는 이 없네. 窓外三更雨(창외삼경우) 창밖엔 깊은 밤비 내리는데 燈前萬里心(등전만리심) 등불 앞에 천만 리 떠나간 마음최치원(崔致遠)은 누구인가 최치원(字 孤雲, 海雲)은 9세기 통일신라 말 6두품(六頭品) 출신의 학자이다. 857년 경주 최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12살 어린 나이로 중국 당 나라로 유학을 떠나 18살 나이로 어렵다는 당나라 과거시험 빈공과(외국인 대상)에 합격한 천재소년이었다.(874년) 황소의 난이 일어났을 때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써서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이 무렵 최치원이 쓴 글은 1만여 편에 이르렀는데 당나라에서 17년 동안 머무르며 나은(羅隱) 등 문인들과 친교를 맺고 문명(文名)을 떨쳤다. 당서(唐書) `예문지(藝文志)`에도 `사륙집(四六集)`과 `계원필경(桂苑筆耕)` 등 그가 저술한 책 이름이 기록돼 있으니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던 것이다. 신라로 돌아온 뒤 신라 49대 헌강왕 아래서 학림학사로 근무했지만 헌강왕이 죽자 외직(外職)으로 물러나 태산군(전라북도 태인), 천령군(天嶺郡, 경상남도 함양), 부성군(富城郡, 충청남도 서산)의 태수(太守)를 지내며 중앙에서 밀려나 있었다. 시대를 제대로 만나지 못해 문관으로의 탁월한 실력을 나타내지 못하고 떠돌아 다녀야 했다. 신라 말, 고려 초 호족(豪族)을 모르면 안 된다. 중앙의 지방통제가 불능에 빠지자 대농장을 소유하고 경제력을 바탕으로 사병을 키운 지방 세력가로 독립적 지배자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스스로를 성주, 장군을 칭하면서 패권을 장악했다. 6두품과 연계해 신라 반체제 세력이 됐다. 또한 유학과 선종, 풍수지리 사상을 받아들여 사상적 기반으로 삼고 새로운 나라, 새로운 왕, 새로운 도읍지를 세워야 한다고 여론을 형성해 나가고 있었다. 그 호족들이 바로 후삼국의 주체가 되는 견훤, 양길, 궁예, 왕건 등의 인물이다. 이러한 난세에 젊은 해외파 유학자 최치원이 아무리 실력이 있다 한들 누가 알아주겠는가. 최치원이 894년 경주 상서장에서 진성여왕에게 나라를 개혁하는 10여 조의 시무책을 제시하였으나 귀족들의 반발로 실현되지 못했다. 삼국사기에 "최치원이 서쪽으로 당에 가서 벼슬을 하다가 고국에 돌아왔는데 전후에 난세를 만나서 처지가 곤란하였다. 걸핏하면 모함을 받아 죄에 걸려, 스스로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한탄하고 다시 벼슬할 뜻을 두지 않았다. 그는 세속과 관계를 끊고 자유로운 몸이 되어 숲 속과 강이나 바닷가에 정자를 짓고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으며 책을 벗하여 자연을 노래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최치원은 관직에서 물러나 각지를 유랑했다. 그리고 말년에는 가야산 해인사에 머물렀다. 정확한 사망 년도는 확인되지 않으며, 방랑하다가 죽었다거나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그는 경주의 남산, 합천 매화산의 청량사, 하동의 쌍계사 등을 즐겨 찾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유교정치 이념을 기반으로 골품제도라는 신분제의 사회적 문제를 극복하려고 했던 그의 사상은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사산비문(四山碑文)` 가운데 하동의 쌍계사에 있는 `진감국사비(眞鑑國師碑)`는 최치원이 직접 짓고 해서체로 쓴 것으로 오늘날까지 그의 필적을 전해준다. 운명의 세찬 바람에 날려 외로운 구름 하나로 남아 한 시대를 표류한 최치원 선생의 흔적을 전국 곳곳에서 찾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모두 최치원이 유랑하던 시절 자취를 한 자락씩 남기고 훌쩍 떠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