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한가운데 섬은 `항상 맑음`이다. 하늘은 가을처럼 부드럽다. 높고 푸른 햇살은 등 돌린 여름의 옷깃을 붙잡고 따가운 햇살을 이어가고 있다. 공기는 제법 선선하다. 가을이다. 그리고 녹색은 점점 탈색되어 간다. 추석이 며칠 지난 오후, 하늘이 내어준 듯 맑고 쾌청한 길을 찾아 긴 걸음을 나섰다. 모든 붙잡음을 뒤로하고 천천히 조금 긴장된 숨결로 산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햇살은 여름인 듯 그러나 바람은 가을이었다.■ 오래전, 어른들이 살아가며 내어 둔 길을 더듬다 오늘 걸음은 태하마을에서 시작해 산을 넘어 현포마을로 이어지는 옛 산길이다. 짧지 않은 산길이고 오래된 기억을 되짚어 걸어야 하는 불투명한 길이다. 마을은 조용하다. 태하마을 한가운데를 지키고 있는 성하신당 입구에서 출발 준비를 한다. 물 사러 들어간 가게에는 가족들이 식사를 하고 있다. 가방 한쪽에 물을 넣고 카메라를 메고 간간이 들리는 사람들의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골목을 지나 산속으로 발길을 옮긴다. 마을 중앙 민가 사이에 보일 듯 말 듯 작은 표식이 있고 생태 탐방로를 안내하는 바닥 글이 있다. 초행이라 입구 찾기가 어렵다면 마을 사람 누구에게나 물어도 그 대답은 이곳으로 안내할 것이다. 이 길은 태하 옛길로 이어지는 길이다. 한참을 오르다 갈림길 표지판이 나온다. 그곳에서 바다 쪽으로 가면 태하 등대와 향목으로 이어진다. 오늘은 산으로 흘러들어 간다. 시작부터 오르막이다. 돌계단을 오르고 소나무 잎 가득한 그늘도 지나야 한다. 가는 내내 군데군데 보라색 해국이 솔잎 사이로 소담스럽게 자리하고 있다. 그렇게 20여 분 걸어 오르면 멀리 민가가 보이고 안내판이 서 있다. 민가를 지나 산 쪽으로 들어간다. 민가 옆, 길 입구는 풀이 무릎을 때린다. 어수선하다. 몇 걸음 옮기고 나면 그제야 산길이 선명해진다. 길의 흔적이 뚜렷하다. 누군가 일부러 만들고 다듬어 놓은 길이 아닌데 길은 훤하고 또렷하다.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길, 산을 넘어 도로와 터널이 생기며 저절로 잊혔던 옛길의 흔적은 무심하게 고스란히 그대로 남아있다. 바로 소나무 군락이다. 나무는 항상 그렇듯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그곳의 역사를 지키고 있다. 그 밑에는 시간의 두께만큼 솔잎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걸음이 부자연스럽다. 드문드문 내리쬐는 햇살에 솔잎은 바짝 말라 발걸음이 뒤로 밀린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바닥으로 송진 냄새가 타고 오른다. 다른 세상인 듯 걸어 오르면 또 다른 나무숲이 나온다. 후박나무와 동백나무 숲이다. 한순간 몸이 깨어난다. 바닥을 지키던 송진 냄새는 사라지고 `바스락` 경쾌한 부서짐이 느껴진다. 그 소리에 꿈에서 깬 듯 다시 걸음이 가벼워진다. 태하마을을 벗어난 지 30분쯤 지나면 안내판이 나오고 길은 평탄해진다. 오른편으로 걸어 들어간다. 보폭만큼 도드라져 있는 길을 따라 걸어 들어간다. 길밖에 보이지 않는다. 주위를 둘러 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나무는 방패처럼 주위를 막고, 풀들은 양탄자처럼 땅을 덮어 가리고 있다. 그저 걷는다. 걸음은 걸어진다. 야트막한 오르막을 오르면 겨우 몸이 느낄 정도의 내리막이 나온다. 걸음은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물 흐르듯 저절로 내려선다. 한참을 무중력 상태인 듯 짙은 나무터널 길을 걷다 보면 한순간 하늘이 뚫린 듯 나무들이 붙잡고 있던 세상을 내어준다. 잠시, 짙게 물들어 있던 숲 냄새를 햇빛에 말려본다.■ 걷는 내내 옛 흔적들이 나타나고 그 모습을 상상한다 여전히 햇볕은 따갑다. 땀이 흐른다. 다시 그늘로 들어간다. 너른 국그릇처럼 생긴 풀밭이 보인다. 잠시 이리저리 둘러보니 예전 누군가 밭을 일구고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넓은 터 한쪽에는 뿌리에서 뻗어 나온 가지가 다섯 개나 되는 마가목 나무가 서 있다. 그 가지에서 또다시 가지가 뻗어 마가목은 하늘을 가리고 있다. 갑자기 경사 심한 언덕이 나온다. 순간 저 위에는 어떨까, 한걸음에 올라서니 이질적이다. 산길이 아니다. 길 중앙에는 시멘트로 길이 나 있고 뭔가 산길에는 어울리지 않게 깨끗하고 비질을 해놓은 듯하다. 숨죽이며 서 있으니 얕은 기계음이 들린다. 군부대다. 그들이 다니며 밟아놓고 정비해 놓은 길이다. 조용히 걷는다. 호기심에 그쪽으로 발걸음을 조금 옮기지만 이내 다시 원래 길로 돌아선다. 언덕을 올라서 오른쪽 오르막으로 오른다. 다시 내리막이고 단단한 시멘트 길은 이어진다. 조금 내려서면 평탄한 너른 풀밭이 보인다. 안내판이 있고 아래로 이어지는 시멘트 길은 계속 이어진다. 깊은 내리막을 따라 또 다른 마을로 내려선다. 안내판 따라 왼쪽 숲으로 들어가면 현포로 내려가는 길이다. 출발한 지 1시간이 지났다. 천천히 아래로 내려간다. 길은 단단하고 조용하다. 어두운 숲이다. 나무는 옆으로 뻗지 못해 하늘을 찌를 듯 높고 그 아래 터를 잡은 식물들은 한순간 손대면 터질 듯 녹색을 가득 담고 있다. 스치는 손길마다 손끝으로 녹색 물이 베어들 듯 진하다. 숲 속 호흡은 진하다. 들숨 날숨마다 진득한 숲 기운이 몸속으로 빨려 들어온다. 살아있음을 느낀다. 숲에 취한 듯 위태롭게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몸은 흐느적거린다. 산허리를 따라 난 길에 습기 가득 품은 흙들이 이질적인 인간의 바닥을 밀어내려 한다. 조심스럽다. 천천히 발끝으로 내려서야 한다. 한 모퉁이 돌 때마다 새로움이 있다. 새로운 소리도 들리고 신기한 식물들도 눈앞을 가린다. 어느 순간, 현포 해안선이 보인다. 나무들 사이로 모자이크된 파노라마처럼 눈 안으로 들어온다. 갈지자로 내려 걸어가면 순간 현포 마을이 훤하게 다 보인다. 일주도로도 보이고 멀리 현포항이 보인다. 밭고랑을 따라가면 도로 옆 민가가 보이고 밭으로 난 길을 따라 내려서면 도로다. 도로를 따라 걸어 내려가면 길옆 큰 건물 마당에는 평생 보기 힘든 양의 호박들이 가지런히 쌓여있다. 호박엿의 재료로 사용될 호박이다. 장관이다. 그곳을 벗어나 조금 더 내려가면 현포 전망대가 있다. 울릉도를 거쳐 간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멋진 풍광을 보여주는 전망대다. 일주도로로 이어 걷지 않고 전망대 밑으로 내려간다. 작은 마을을 따라 시멘트 길을 걷다 보면 길은 갈라진다. 오른쪽은 사람이 사는 민가, 왼쪽은 쓰러져 가는 폐가가 보인다. 바닥을 보면 탐방로 안내표시가 있다. 표시를 따라 폐가 앞을 지나 또다시 소나무 숲으로 들어간다. 파도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뛰다시피 걸어 내려가면 오늘 걸음의 종착지인 울릉도 독도 해양과학기지 건물이 보인다. 태하마을을 출발한 지 한 시간 사십여 분이 지나 도착했다. 혼자 걸음이었지만 걷는 내내 지루하지 않았다. 울릉도 옛길은 예전 그들이 남겨둔 이야기를 들려주듯 매 순간 새로움이 가득했다. 숲은 진한 향기로, 포근하고 푹신한 나뭇잎 바닥으로, 따가운 가을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낸 파라솔 같은 나무들, 그들이 걷는 이의 말벗이었다. 잠시 쉬며 기억한다.■ 산으로 둘러싸인 포근한 현포마을, 언제나 평화롭다 다시 일어서 걷는다. 기지를 벗어나 오른쪽으로 쭉 뻗은 길을 나가면 현포항과 마을이다. 길옆에는 보라색 해국이 바닷바람에 살랑이고 바다는 투명하게 속을 보인다. 큰 도로로 접어들어 모퉁이 돌면 그제야 마을의 본 모습이 나타난다. 현포는 포근한 동네다. 다른 곳과 달리 계곡을 따라 만들어진 마을이 아니다. 산이 마을을 빙 둘러싸고 있다. 교실 창문으로 바다가 훤히 보이는 학교가 있고 집들은 촘촘히 모여 있다. 커다란 항구가 있고 너른 밭도 있다. 항에는 오징어잡이 배들이 떠 있고 밭에는 부지깽이 나물과 미역취가 진녹색 잎을 키우고 있다. 항은 넓고 파도는 잔잔해 멀리 보이는 노인봉 커다란 바위가 수묵화처럼 파도에 투영된다. 태하마을에서 시작해 현포 마을로 이어지는 약 4km 산길을 1시간 30분가량의 걸음으로 걸었다. 오르막을 오르고 완만한 능선을 타고 걷다 내리막을 내려서는 투박한 칼국수 가락같은 산길이다. 오래 간직하고 싶은 길이다. 오랜 흔적 지우지 말고, 새로움을 보태지 말고, 사람의 호흡과 발로만 그 자리를 채웠으면 좋겠다. 참 개운하고 고마운 걸음이었다. 이 고마움, 온몸 가득 담아 새로운 걸음으로 옛 흔적 더듬기를 이어간다. 임정은 기자 05479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