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문자 이전에 음성언어가 먼저였다. 문자가 없어 기억에 의지해 살아갈 수 있는 단위는 부족이 한계였다. 인구가 늘어나고 도시가 생겨나 기억만으로 지탱할 수 없을 때 `쓰기`라는 도구가 발명됐다. 그때의 `쓰기`는 지금의 인터넷 문명만큼이나 위대한 발명이었고 인류가 도약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에 `우르`라는 도시가 출현한 배경에는 수메르인들이 사용했던 `쐐기 문자`가 있었다. 또한 15세기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달은 근대사회를 탄생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처럼 인류는 기록을 바탕으로 진화해 온 게 사실이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개인의 선사시대란 기록 없이 살아가는 시간을 말한다. `시간`이라는 공평한 시스템을 흘려보내느냐 기록으로 쌓아두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이 달라진다. 나는 주 5일 계단 오르기를 2년 이상 실행하고 있는 중이다. 처음에는 10층을 오르고 그다음 날부터 한 층씩 더 오르는 일로 지금은 40층을 오르고 있다. 허리 건강을 위해 시작했지만 일상에 필요한 에너지를 확보하는데 더없이 좋은 방법이었다. 새로운 습관을 만들 때도 기록은 작심 3일을 넘기는 중요한 에너지로 작용했다. 뇌는 눈에 보이는 것에 반응하기 때문에 생각을 털어내 기록하고 그 기록을 눈으로 확인하게 되면서 계획을 꾸준히 실행하는 데 큰 역할로 작용하게 됐다.
시간을 흘려보내지 않고 기록하고 쌓는 사람들은 변화를 경험하고 성장을 경험할 수 있다. 나는 무언가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다이어리에 기록하는 습관이 있다. 감사 일기를 기록하면서 감사 신경계를 활성화 시킬 수 있었고 감정일기를 기록하면서 감정의 기복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에너지 잔고도 점검할 수 있어 참으로 유용했다. 좋은 감정을 가지는 일도 좋은 습관을 가지는 일도 기록을 하면 점차 나은 방향으로 변화될 수 있었다. 나는 어떤 지점에서 에너지를 얻고 어떤 지점에서 에너지를 잃는 사람인지 객관적인 자아를 만나는 일도 기록을 하면서 구체적일 수 있었다.
마지막 사춘기인 갱년기를 관통하던 감정은 `불안`이었다. 이 `불안`을 해결하는데도 기록의 역할이 컸다. 불안은 머리 안에서만 머물면 자칫 부정적으로 증폭되기 쉽고 머리를 털어 기록을 하면 그 실체를 줄일 수 있다. 내 삶이 훨씬 스마트해진 이유다. 책을 읽고 기록을 하면서 타고난 성향인 줄 알았던 생각의 소낙비를 그치게 할 수 있어 내가 훨씬 단단해졌음을 느꼈다. 기록으로 삶의 큰 기술을 얻어낸 셈이다. "가덕 해역으로부터 함대를 철수시켜 한산 통제영 모항으로 돌아오자 의금부 도사는 선착장에서 나를 묶었다. 포승은 뼈를 파고들 듯이 억세었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죄목은 조정을 능멸했고 임금을 기만했으며 조정의 기동출격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김훈 작가가 쓴 `칼의 노래` 중 일부다. 무능한 선조는 군사를 기르지 않았고 오합지졸의 백성들이 온몸으로 전쟁을 막아내는 동안 오직 정쟁에만 몰두해 있었다. 전장을 전혀 읽을 줄 모르는 조정은 왜구가 육지로 기어오르자 해군이었던 이순신에게 바다를 버리고 육지를 지키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에 응할 수 없었던 장군을 의금부 도사가 와서 포승으로 묶었다. 소설의 행간에 차고 넘치던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사내의 불안을 상상하다가 왜 난중일기는 감정을 빼고 팩트만 써 내려갔는지 이해하게 됐다. `불안`이라는 감정은 기록으로 털어내야지 그렇지 않으면 머릿속에서 폭발물이 되어버릴 테니까. 한 인간이 맞닥뜨린 거대한 불안을 떨쳐내는 방법이 7년 동안을 기록한 난중일기였으리라.
기록은 진보다. 인류는 물표에서 점토판으로 갈대로 나무판으로 종이로 디지털로 변화하면서 소통해 왔다. 이제는 디지털(CCTV, 스마트폰, 인터넷)이 24시간 우리의 무의식에 접속해 인간의 모든 행위를 기록하고 있다.
개인으로 돌아오면 기록은 또 하나의 자아다. 감정일기를 오랫동안 써 온 나는 그 감정을 풀어서 시를 쓰고 시인이 되었다. 또한 책 쓰기는 기타로 치자면 어려운 코드를 열심히 연습하는 구간이었다. 긴 연습 구간이 끝난 지금 여전히 책을 읽고 밑줄을 긋고 밑줄을 기록하는 중이다. 대나무가 마디를 만들어 성장하듯 기록은 내 마음의 키를 키워 세상을 보는 여러 겹의 눈을 가지게 했다.
이제는 하나의 자아만으로 살아가기에 노후가 너무 길다. 요즈음 본캐 부캐라는 말이 소비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