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썹 위 작은 흉터를 거울에 비춰본다. 초승달 모양이 대각선으로 떠 있다. 밝은 살색에 1.5센티 정도의 크기이다. 다행히 앞이마의 애교 머리카락이 살짝 가려주니 남의 눈에 쉽게 드러나진 않는다. 하지만 바라볼 때마다 그날의 악몽이 되살아난다.
이태 전이었다. 평소 호박죽을 쒀서 주변 지인들에게 나눠 먹는 걸 즐겼던 터라 그날도 큰 찜통에 한가득 죽을 끓여 출근길에 가지고 가기 위해 차에 실었다. 얼른 출발하기 위해 차 문을 닫는데 갑자기 왼쪽 눈 쪽에서 뜨거운 불이 일었다. 얼굴을 채 빼기도 전에 차창을 닫은 모양이었다. 나도 모르게 아픈 곳을 만지자 피가 흥건히 묻어나왔다. 상처를 확인한 외과 의사는 흉터가 남을 수 있으니 성형외과 쪽으로 가는 게 좋을 것이라 권했다. 결혼을 앞둔 처녀도 아니니 상관없다는 말에 빙긋이 웃으며 꼼꼼히 꿰매주었다. 잘 아물어서 얼른 보면 눈에 띄지 않을 정도의 흉터라 그나마 다행이다.
오십대 초반 어느 날이었다. 때마침 퇴근한 남편이 모임에 간 뒤라 가벼운 식사를 마치고 샤워 후 드라마를 시청할 셈이었다. 서둘러 끝내고 물기를 닦는 중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몇 번 연거푸 울려 혹시라도 끊어질세라 전화기를 향해 냅다 달렸다. 그때 미처 닦지 않은 발바닥의 물기 때문에 꽈당! 미끄러지며 오디오 모서리를 들이받은 후 정신을 놓아버렸다.
얼마나 누워 있었을까? 아픈 정수리를 만지는데 끈적끈적한 액체가 손에 잡혔다. 붉은 피였다. 황급히 수건으로 지혈하며 옷을 입으려니 메스꺼움이 훅 올라오며 현기증이 왔다. 상황이 심상찮음을 깨닫고 습관처럼 남편에게 알렸다. 조금 다친 거 같으니 천천히 오라고 당부했지만 남편은 놀라 급히 도착했다. 뒷자리에 누워 병원으로 가서 열네 바늘을 꿰맸다.
어린 시절, 엄마가 장에 가고 없던 날이었다. 화장대 위에 입술연지가 놓여 있었다. 엄마가 화장할 때 입술에 칠하면 놀랍도록 예쁘게 변하는 걸 보아왔던 중이라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거울 앞에 앉아 아래위로 문지르는데 갑자기 연지가 뚝 부러져버렸다. 혼비백산해 얼른 뚜껑을 닫고 가슴 콩닥거리며 방을 나왔다.
장에서 돌아온 엄마는 미처 덜 지워진 입술의 붉은 자국으로 낌새를 알아챘다. 고개를 푹 숙이는데 귓불에서 번쩍 번갯불이 일었다. 순간 맞은 자리의 아픔보다 엄마의 성난 눈빛이 가슴에 박혔다. 그 후 엄마는 두려운 존재가 됐다. 엄마 앞에선 자신감을 잃었으며 언제나 긴장하는 버릇이 생겼다.
돌을 갓 넘긴 딸에게 사고가 일어났다. 부엌에서 설거지하고 있는데 우는 소리가 들려 부리나케 들어가자 아이 입 꼬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간밤의 물 대접을 미처 치우지 않은 채 머리맡에 뒀던 게 화근이었다. 아마도 그 깨진 사기그릇의 날카로운 조각을 물고 놀았던 모양이다. 득달같이 아이를 업고 외과병원엘 갔다. 찢어진 상처를 몇 바늘 꿰매는 치료와 함께 엉덩이에 주사를 놓아주었다. 그러나 병원을 다녀온 아이가 밤새 칭얼거리며 보챘다. 아침에 주사 맞은 자리가 퉁퉁 부어올랐다. 다시 간 병원에선 고름을 짜고 꿰매는 치료가 이어졌다. 세균감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 후 성인이 된 딸이 흉터에 관해 물어보았을 때 당시 상황을 들려주다 울컥 하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입술연지를 훔쳐 발랐던 나이의 딸을 둔 엄마가 됐다. 동생과 다투며 반항하는 딸을 호되게 꾸짖으며 회초리를 드는 일이 자주 생겼다. 그럴 때마다 그 옛날 내게 따귀를 때리던 엄마의 화난 얼굴이 떠올라 쳐들었던 팔을 슬며시 내리고 말았다.
살면서 크고 작은 사고가 끊임없이 일어났지만 별 탈 없이 살아왔다. 육체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치유가 되지만 마음의 상처는 그렇지 않을 때가 많다. 반목과 원망, 애증의 시간은 책갈피에 끼워둔 마른 잎이나 미라처럼 그렇게 빛바랜 모습으로 남아 때론 희미해진 기억을 소환하곤 한다.
다시 흉터를 들여다본다. 이젠 모든 상처들과 화해를 할 나이가 됐다. 크고 작은 아픔들은 어쩌면 지금의 나를 이루는 근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모든 상처는 다 따뜻하다. 편안해진 마음 한 자락을 초승달 위에 살짝 얹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