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윤석열 대통령 헌법재판소 선고가 임박했다는 관측이 나오는 가운데 주말인 15일엔 광화문 등에서 찬반 집회가 각각 100만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집회를 준비하고 있다고 언론은 보도했다.  광화문이라는 명칭은 언제부터 사용됐을까?  광화문의 명칭이 처음으로 문헌에 표기된 것은 태조실록(1395년 9월)에서 볼 수 있다.    아울러 세종 10년(1428년)엔 광화문에 종을 매달아 억울한 일이 있는 백성들로 하여금 종을 치게 해 백성들이 원통하고 답답한 일을 호소할 수 있도록 했으며 1434년 3월에 광화문이 완성된 것으로 실록엔 기록하고 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제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천심에 순응하고 민심에 좇을 따름이다"라고 했고 서경에는 "하늘이 보는 것은 우리 백성이 보는 것으로부터 보며 하늘이 듣는 것도 우리 백성이 듣는 것으로부터 듣는다"고 했다.  이렇듯 우리 선조들은 광화문에서 상소를 올려 시시비비를 국왕에게 전했으며 국왕은 광화문에서 무과시험을 치르게 하고 군사를 지휘하며 곡림(哭臨-죽은 신하를 몸소 조문함)하는 등 민심은 천심이라 해 백성들의 뜻을 받들어 백성이 우선인 정치를 구현하기 위한 참된 협치(協力的 統治, Governance)를 실현하고자 했다  우리나라는 지난 1987년 6월 항쟁 이후 한국의 민주화가 본격화 되면서 시민사회의 공론의 장과 조직화를 위한 시민권이 제도적으로 보장돼 한국의 시민운동은 압축형 고도성장을 해왔다.  규모면에서도 사회적 영향력에서도 급격한 확대를 보여줬다.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시민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부안 핵폐기장 반대운동, 이라크파병 반대운동, 태안기름 유출사고, 광우병 파동, 세월호 사고, 사드배치 반대운동 등 많은 촛불집회가 이어져 왔으며 2000년대 이후의 시위문화는 보편적으로 평화적인 집회로 진행돼 왔다.  이 같은 상황은 예전의 폭력적 시위문화의 구태에서 벗어나 우리 시민들의 성숙된 민주시민의식의 구현으로 인해 시위가 아닌 문화축제로 변화된 평화적인 집회문화를 승화시키려는 시민들 간의 공감대가 형성돼 가는 고무적인 현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보이스카우트에는 선서와 12규율이 있다. 스카우트로서 나의 의무를 다하고 항상 남을 도와주겠다는 스카우트 선서와 12규율을 지킬 것을 다짐하고 1일 1선을 실천, 생활화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내용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천해 가야 할 덕목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스카우트 대원들이 선서와 규율을 실천할 것을 다짐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보편적인 사람들은 그럴싸하게 좋은 말을 늘어놓지만 실제로 자기가 그것을 지켜 나가는 경우는 매우 적다고들 한다.  우리 주변에는 국민을 일깨우고 올바른 실천을 당부하거나 권장하는 문구들이 많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실천하는 사람은 너무나 적다는 것이다.  앞으로 우리는 말만 앞세우지 말고 `나`부터 먼저 실천해 보자. 아무도 보는 이가 없어도 우선 나 자신만이라도 바른 일을 행해보자.  나 혼자에 그치지 말고 한 사람이라도 더 바르게 행하도록 그들을 이끌어 가 보자.  특히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공유하는 도덕과 규범을 실천해야 하고 공동체의 유지·발전에 필요한 태도와 자질을 더욱 공고하게 갖춰야 한다고 생각된다.  아울러 사회현상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타인과 집단 내에서 서로 협력하는 사회적 능력을 갖춰야 함은 물론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를 추구하고 공공의 이익에 관심을 갖고 참여할 때 비로소 진정한 민주시민의식을 가진 민주시민으로 거듭날 수 있다 보여진다.  작금의 상황을 시의적절하게 표현해 주는 시구가 `앙면문천천역고(仰面問天天亦苦)`다.  시구의 내용은 "고개를 들어 하늘에게 물으니 하늘 또한 괴롭다"는 뜻을 의미하는데 좀 더 의역해 보면 "혼자 괴로워하다가 세상일이 왜 이러냐고 하늘에 따져 묻자 하늘이 답하기를 나도 괴로워 죽겠다"라는 말이다.  한마디로 현 세태를 잘 꼬집어 주는 시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평생을 쉬지 않고 흘러가는 시냇물을 보자. 그리고 우리 모두는 힘겨운 장애물을 만나도 바다를 향해서 자기의 목적을 절대로 변경하지 않고 쉼 없이 흘러가는 시냇물의 마음을 담아보자.  오늘에 쓰여 지고 내일에 마를 우물이 아니라 영원히 출렁거릴 우리 모두의 바다를 만들어 보고 시냇물 같이 도전도 해서 나부터 실천하는 또 다른 바다를 향한 시냇물의 흐름이 돼 보는 것은 어떨까하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우리는 차가운 이성이 아닌 따뜻한 감성에 호소하는 방식이 협력과 나눔을 회복하는 길이라 생각하고 협력이 가능한 사회, 질서와 규범, 신뢰가 있는 사회가 발전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된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