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이란 그리움이며 가슴을 채워 주지 못한 마음 속의 공허다.
나의 고향은 아늑한 산골마을 반촌이다.
지금은 인근 도시에서 전원마을로 각광을 받아 외지인들이 많이 입주해 살고 있지만 나의 가슴에는 지금도 독립된 집성촌 양반마을로 왕국처럼 남아 있다.
오래전부터 나의 핏줄은 그곳에서 살아왔다.
나의 15대조이신 입향조 할아버지로부터 대대로 선조가 묻힌 땅이다.
산촌의 계절은 산들바람이 가르쳐준다.
산뜻한 봄바람이 걷히고 풋 냄새가 풍기는 산바람이 불어오면 무더운 훈기로 여름이 시작된다.
그 산뜻한 해돋이도 여름 아침엔 반갑지 않다. 온 종일 내리쪼일 폭염의 두려움에서다.
여름 해는 아침 7시면 도연 산봉우리 위에 떠 있다. 모기장을 걷고 세수를 하는 둥 마는 둥 아침 밥상을 대한다.
밥상 위에는 꽁보리밥 그릇과 된장찌개에 풋고추나 고작해야 생오이 몇조각이 놓여 있다.
그러나 밥상에 둘러앉아 그릇에 담긴 음식을 모두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운다.
맨날 먹어도 허기진 시대며 시절이었다.
그 당시 여름은 참으로 힘든 생존을 위한가난한 땅의 여름이었다.
대대로 농사꾼이었던 우리 집은 면소재지에서 소주도가, 고무신가게 등 상업의 길로 나서면서 논밭 등 재산을 하나씩 하나씩 처분해 땅 한 평 없는 가난뱅이 집이 됐다.
그 후론 부모님은 폭염의 더위 속에서도 화전민처럼 야산을 밭으로 일구어 우리를 키웠다.
꿈에도 잊지 못할 일명 웃말 밭이다.
그래도 나는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렇게 힘든 줄도 모르고 마냥 친구들과 어울려 냇가에 가서 수영을 하고 논둑을 헤매며 개구리 사냥을 하는 등 철모르게 지냈다.
단오와 망종이 지난 초여름의 긴 햇살이 기울고 집집마다 굴뚝에서 저녁 밥을 짓는 연기가 솟을 때면 마당 한가운데 모깃불을 피운다.
보리타작을 한 후 남은 보릿대에다 생 솔갱이 불에선 보리냄새와 송진 냄새가 묘하게 조화를 우리며 풍겼다.
저녁상을 물린 동네사람들은 더위를 식히기 위해 홰나무 걸로 모인다.
그곳에도 모깃불은 피워졌고 짧은 여름밤이지만 각자가 살아가는 이야기로 자정까지 보냈다.
이럴 땐 청소년들은 이웃집 마당에 쌓아놓은 조릿짚단으로 만든 그 속에서 끌어안고 뒹굴면서 여보당신이라 부르고는 마주보며 깔깔 웃기도했다.
그때만 해도 젊은 남녀가 같이 자리를 하거나 이야기를 주고받는 일이 드물없다.
그러나 여름날 더위를 식히기 위해 홰나무 아래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흉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가끔은 동네 처녀총각의 사랑 마당이 되기도 한다.
자정이 되고 밤이슬이 촉촉이 내릴 때쯤이면 하나 둘 집을 찾아 들어간다.
그러다 마지막 까지 남는 남녀가 가끔 있었다.
나도 홰나무 걸에서 한 여학생과 자주 만났다.
그녀는 집성촌마을의 친척이라 감히 연애상대는 되지 못했지만 갑자기 천둥이 치고 소나기가 쏟아지던 어느 날 초가집 처마 밑에서 비가 그치도록 오랜 시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헤어지기도 했다.
깊어가는 여름밤 모기장 사이로 매캐하면서도 향긋한 그 냄새, 재채기나 기침이 나올 것 같으면서 코끝을 스쳐가는 그 풀잎 타는 냄새, 이제 도시의 매연 속에 찌들어버린 후각으로 우리는 고향의 모깃불 냄새를 맡을 수 있을까.
가끔씩 가는 고향집에서 하룻밤 잠을 청하려면 그 매캐한 냄새의 모깃불 향이 그립고 소나기가 내리던 여름밤이 생각나 쓴 웃음을 짓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