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를 타고 날짜 변경선을 넘어본 지도 여러 해가 됐다. 2020년 2월 코로나가 창궐하기 전 일본을 여행한 것이 마지막 해외여행이다. 그러나 일본 여행이나 호주 여행은 같은 경도(經度) 선상에서 움직이다 보니 날짜 변경선을 건널 때 느끼는 그 미세한 설렘 같은 것은 맛보기 힘들다.
우리는 북미로 여행할 때 날짜 변경선을 넘는다. 기억이 정확하다면 캄차카반도를 지나 유라시아대륙 끝부분에서 날짜 변경선은 경도를 따라 내려온다. 비행기 앞 좌석에 달린 TV화면을 통해 `비행 루트`를 지켜보는 일은 다른 세상으로 진입하기 위한 예열(豫熱) 과정이다.
몇 시간 만에 낮과 밤이 바뀌는 것을 인간의 몸은 적응하지 못한다. 시차증(jet lag)이다. 생체 리듬이 바뀐 낮과 밤에 따라가려면 최소 하루 이틀은 걸린다. 시차증은 다른 시간대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장료다.
유럽에 갈 때 비행기는 몽골 초원, 시베리아, 우랄산맥 등을 횡단한다. 불과 150년 전까지만 해도 사람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반경 100㎞를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21세기의 여객기는 지리적 공간을 마필(馬匹)보다 1000배속의 속도로 이동하면서 낮과 밤을 순식간에 바꿔버린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 어쩔 수 없이 우크라이나 지도를 하루에 최소 한 두 번씩은 보게 된다. 수도 키이우를 중심으로 마리우폴 등 내륙 지방과 크림반도 주변 지역이다.
나는 러시아는 여행한 일이 있으나 우크라이나 땅을 밟아본 일은 없다. 그런데도 우크라이나 하면 가보고 싶은 도시가 한 곳 있다. 오데사(Ode ssa). 키릴 문자로는 Oдeca. 흑해 연안의 항구도시이면서 우크라이나 세 번째로 큰 도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같은 키릴 문자를 쓰지만 읽는 법은 완전히 다르다.
오데사. 내가 이 도시를 기억하는 것은 순전히 지명 때문이다. 발음하기 쉽고 귀에도 잘 들린다. 한글로 표기해도 아름답다. 마치 체코의 프라하(Praha)처럼 도시 이름에서 어떤 향기 같은 게 묻어난다. 내가 오데사라는 도시명을 기억하게 된 것은 아마도 세계지리부도를 이리저리 넘기며 지명을 외우던 중고교 시절이 아닌가 싶다. 대체로 러시아 지명들은 길고 발음하기가 힘들다. 귀에 쏙쏙 들어오지 않으니 잘 외워질 리 없다. 그런데 오데사는 정반대였다. 딱 한번 봤는데 잊히지 않았다. 오데사! 얼마나 매혹적이고 낭만적인가. 다행스럽게도 오데사에는 포연(砲煙)이 자욱하지 않다고 한다.
내 인생에서 두 번째로 기억된 우크라이나 지명은 키이우. 청소년 시절 소피아 로렌 주연의 영화 `해바라기`를 인상적으로 보았지만 그 배경이 우크라이나였다는 사실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우크라이나군이 필사적으로 방어해 내는 키이우! 나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전까지 아무 생각 없이 `키예프`라고 읽고 썼다.
내가 키이우를 기억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알렉산드르 푸시킨(1799~1837) 덕분이다.
외교관이면서 시인인 푸시킨은 1820년 반역 혐의로 체포되어 유배형에 처해진다. 제정 러시아나 소련 시절 정치범들은 대부분 1급 유배지인 시베리아로 보내졌다. 푸시킨도 처음에는 시베리아 유형(流刑)이 검토됐다. 하지만 푸시킨의 아버지가 황실에 선처를 요청했고 이 진언이 받아들여져 시베리아에서 2급 유배지인 `키이우 일대`로 변경된 것이다.
귀족 집안 출신으로 귀족학교 리체이 1기생인 푸시킨은 왜 반역 혐의로 몰렸을까. 귀족 엘리트 학교를 졸업하고 부친의 희망대로 외교관의 길에 들어선 푸시킨. 직업 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푸시킨은 시작(詩作)을 계속했다. 그가 1810년대 말, 스무살 언저리에 쓴 시가 `자유`다.
`자유`가 입소문을 타고 퍼져나갔다. 그런데 이 시를 코란처럼 암송한 그룹이 있었다. 데카브리스트 회원들이다. 데카브리스트는 `12월당`이라는 뜻.
러시아는 1812년 모스크바로 쳐들어온 나폴레옹 군을 패퇴시킨다. 모스크바를 통째로 비워버림으로써 싸우지 않고 나폴레옹 군대를 물리쳤다. 일단의 기병 장교들과 코사크 병사들이 퇴각하는 나폴레옹 군대를 추격하며 파리로 진격한다. 러시아 장교들은 점령군으로 파리에 머물면서 자유의 공기를 만끽한다.
파리를 경험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청년 장교들은 달라져 있었다. 차르 전제정치의 폐해가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모든 면에서 서유럽에 크게 낙후된 러시아를 발전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전제정치를 무너뜨리는 방법밖에 없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변화에 대한 열망으로 끓어오른 이들의 가슴에 불을 지핀 시가 바로 `자유`였다. 차르의 친위부대는 `자유`를 불온한 시로 규정했고 시의 원작자가 외무성 직원 푸시킨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푸시킨이 체포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