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서 미얀마까지는 3500㎞나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나 지금 미얀마인과 한국인 사이 마음의 거리는 1㎞도 안 되는 것 같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외치며 군사 쿠데타에 목숨의 위험을 안고 항거하는 미얀마 사람들에게 연대감을 느끼는 한국인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울려나오고 있다.
광주를 비롯해서 전국 지자체들이 미얀마 유혈사태를 규탄하고 유엔의 지원을 촉구하는 성명을 내는가 하면 수많은 종교 및 시민사회단체가 모금운동을 벌이자 1만원, 2만원, 3만원, 5만원, 10만원씩 미얀마돕기 계좌에 입금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민주화를 위해 궐기했던 동병상련의 마음이다. 자유와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몸으로 부딪치며 느꼈던 한국인들의 연대감이 미얀마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와 희망을 주고 있다고 한다.
지난 2월 1일 민주통치를 중지시킨 군부 쿠데타 이후 미얀마의 봄은 연일 피로 얼룩지고 있다. 군부의 통제속에 언론의 취재가 극도로 제한된 미얀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소상히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외신이 보도하는 참상은 가히 야만적이다.
지금까지 550여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어린이 40여명을 포함해 직접 데모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들도 군과 경찰의 총탄에 피흘리며 쓰러졌다. 군인들은 총탄 증거를 없애기 위해 희생자 시신을 불태워 훼손하기까지 했다.
보안군들이 집에 쳐들어가 시위 혐의자를 내놓으라며 가족을 고문했다. 데모를 하는 이모를 향해 "왜 거리에서 외치느냐"고 말하는 순진한 10세 소녀가 마을에 쳐들어온 군인의 총에 관자놀이를 맞고 죽었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공포분위기 속에서도 "내 아이의 미래를 위해 죽겠다"며 민주주의를 외치고 데모하는 젊은 엄마들 이야기가 비장하면서 안타깝다.
군부의 시위 진압이 난폭해지고 장기화되면서 미얀마 사회에는 두 가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사무실에 출근하지 않거나 일을 하지 않는 불복종 운동이 공무원과 은행원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다. 또 많은 시위자들이 군경의 위협으로 산속으로 내몰리면서 총기 훈련을 받으며 게릴라 전으로 군부에 맞설 준비를 하고 있다. 로힝야 등 100여개의 소수민족으로 이뤄진 미얀마는 내전의 위험성도 높아지고 있다니 또 다른 비극이 싹트고 있는 셈이다.
미얀마는 `버마`라는 이름으로 지난 1960년대와 1970년대를 살았던 한국인에게 적지 않은 기억을 남겼다. 영화 `콰이강의 다리`에서 버마의 정글을 보며 한국의 민둥산과 비교했고 이 나라가 영국과 일본으로부터 시련을 당했던 것을 알았다.
차범근 시대의 한국 축구가 `몽몽틴`, `몽위몽` 등 이상한 이름을 가진 버마 대표팀 선수들의 기민한 활약에 쩔쩔매던 기억이 새롭다. 두 나라 다 같이 군부독재가 지배하는 권위주의 정권이었던 시대였지만 버마는 한국과 비교해서 뒤지지 않은 나라라는 인상이 강했다. 한국의 발빠른 경제성장으로 잊혀지던 버마가 한국인의 뇌리를 때린 것은 지난 1983년 한국 대통령 방문을 노려 북한이 설치한 폭탄이 터져 다수 각료를 포함한 한국 정부 요인 17명이 사망한 아웅산테러 사건이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