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바위`, `밝은바위`를 의미하는 표암(瓢巖)은 신라시대 화백회의를 통해 신라 건국을 의결한 역사적 장소로 알려져 있다. 신라 6촌 가운데 알천 양산촌의 시조 이알평이 이 바위에 내려와 세상을 밝게 했다고 해 표암이라고 부른 것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문화재청은 경주 금강산 표암봉 일원이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난 17일 지정했다. 경주 금강산 표암봉 일원은 신라 왕경오악 중 북악이자 이차돈 순교 관련 불교성지로 역사·학술적 가치가 뛰어나다.
지난 4월 22일부터 30일간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지정을 예고했고 지난 8일 심의 절차를 거쳐 17일 확정 심의절차에서 지정이 결정됐다.
경주시 관계자는 "이번 사적 지정은 신라 초기 역사의 중요한 상징지역이 지정된 것은 물론 경주 금강산의 본래 이름을 공식적으로 찾은 것에 큰 의미가 있다"라며 "문화재청, 경북도와 협력해 경주 금강산 표암봉 일원을 체계적으로 보존·관리하고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 시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경북도, 심층 학술조사와 종합정비계획 수립
표암 화수회는 10여년 전부터 경주 금강산 표암봉 일원을 문화재로 지정받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상록 표암 종친회장은 "표암봉은 신라 6촌 가운데 알천 양산촌의 시조 알평공이 이 바위에 내려와 세상을 밝게 했다고 해서 표암이라고 전해지고 있다"라며 "삼국시대 신라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사찰, 석불, 고분 등 많은 유적이 밀집돼 있어 사적으로 지정해 체계적으로 보존·관리를 할 수 있게 돼 기쁘다"고 했다.
경북도는 올해 5억원의 사업비를 투입해 문화재청·경주시와 함께 심층 학술조사와 종합정비계획 수립 용역을 실시해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체계적인 보존과 관리 방안을 마련해 나갈 방침이다.
김상철 경북도 문화관광체육국장은 "경주 낭산과 경주 남산 일원에 이어 경주 금강산 표암봉 일원이 국가지정문화재(사적)로 지정되면서 신라문화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한층 높아지게 됐다"라며 "신라왕경 전체를 디지털 기술로 복원하는 등 문화유산 디지털 대전환도 서두르고 있다"고 했다.
■ 왕경인의 사후 안식처이자 신라의례의 공간
경주 금강산은 신라건국과 국가 형성단계의 중요한 신성한 공간일 뿐만 아니라 `삼국유사` 기이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 기록된 진한 6촌 중 3개 촌의 천강설화와 연관된 역사적 공간이기도 하다. 이러한 신라의 신성한 공간으로서의 역사적 상징성은 여러 기록을 통해 조선 시대까지 이어져 왔다.
신라 왕경오악(王京五岳, 왕경의 중앙과 사방을 둘러싼 신성한 산으로 동악은 토함산, 서악은 선도산, 남악은 남산, 중악은 낭산, 북악은 금강산)의 북악(北岳)이자 국가의 중대사를 논의하던 사령지(四靈地)로 신라의 중대한 일이 있을 때 모여 회의하던 장소중 하나로 신라의 신성한 공간이다.
신라의 정치·종교·의례와 관련한 중요한 문화유산이 밀집한 지역으로 신라형성의 터전인 신성한 역사적 공간성과 신라불교 성지로의 상징성, 신라 의례의 장소성 등 신라사의 중요한 전환기 모습이 잘 드러나는 유적이다.
■ 이차돈 순교와 관련된 신라 불교성지
이 일원은 신라 불교공인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이차돈과 연관된 백률사와 이차돈순교비 등 불교 수용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이차돈 순교비는 높이 106cm이며 각 면의 너비 29㎝.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불교를 제창하다 527년(법흥왕 14)에 순교한 이차돈(異次頓)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됐다. 백률사석당기(栢律寺石幢記) 또는 이차돈공양비(異次頓供養碑)라고 부르기도 한다. 1914년 사지로부터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석당은 화강암제의 육면 기둥으로 방형의 석재 윗면을 육각형의 복련(覆蓮)으로 새긴 대좌 위에 세워져 있으며 원래 당위에 옥개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제1면에는 이차돈의 순교장면을 부조했다. 제2∼6면에는 정간(井間)을 치고 각 정간에 자경 3㎝의 글자를 새겨 넣었다. 각 면의 명문은 마멸이 심해 절반 정도만 판독된다.
주변으로 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보물), 경주 동천동 마애삼존불좌상(시도유형문화재) 등 신라 불교 문화와 예술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문화재가 분포하고 있다.
표암봉 일원에 위치한 굴식 돌방무덤의 동천동 고분군은 왕경의 매장공간이 도심 중심에서 주변 산지구릉으로 이동하는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문화유산이다.
■ 표암 암각화, 신라 만월부인의 작품으로 추정
2011년 표암에서 나무를 제거하던 중 지상 5m 높이의 바위에서 통일신라 때인 743년(경덕왕 2년)에 새긴 것으로 보이는 마애암각화를 발견했다. 바위 표면에 명문과 불전, 삼층목탑, 당간, 불번, 산문 등이 새겨진 통일신라시대 마애암각화가 발견돼 주목을 받았다.
마애암각화는 가로 2m, 높이 2.3m의 바위에 가로 150㎝, 세로 100㎝ 크기로 명문 12자 `天 寶 二 年(?) 月 夫 今(令) 子 上 世 也(?)` 와 당간지주, 삼층목탑, 불전, 승상(僧像)이 음각 형태로 새겨져 있다. 마애암각화는 통일신라시대 불교 조각사와 사상사, 사회사, 금석학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표암 암각화는 신라 만월부인의 작품으로 추정된다는 주장도 있다. 한국고대사 전공인 박대재 고려대 교수는 지난 2012년 `새로 발견된 표암 암각화`라는 발표문에서 이들 암각화와 함께 발견된 문자를 `天寶二年滿月夫人干子上世也`라고 판독하면서 이같이 추정했다.
바위 표면에서 발견된 불당, 불탑, 불번(깃발) 등의 선각화는 신라 35대 경덕왕의 후비(後妃)인 만월부인(滿月夫人)이 아들을 낳고자 하는 기원을 담아 남긴 그림이라는 주장이다.
그는 판독에 논란이 분분한 문자를 이처럼 읽어낼 수 있다고 하면서 이 구절은 `천보 2년(743)에 만월부인이 천상세존(天上世存. 부처)께 아들을 기원합니다`로 해석할 수 있다고 했다.
따라서 박 교수는 이들 암각화가 불당과 탑이 있는 사찰에서 만월부인이 당번(幢幡. 불교의식에 사용하는 깃발)을 봉안하면서 아들을 낳기는 기원하는 의식을 담은 그림으로 볼 수 있다고 추정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만월부인은 경덕왕이 원래 부인인 삼모부인(三毛夫人)이 아들을 낳지 못하자 그 후비로 들어갔다. 한동안 아들을 낳지 못하자 불국사 승려 표훈(表訓)이 하늘로 올라가 빌어서 나중에 혜공왕을 낳았다고 한다. 박 교수는 이런 기록을 대비할 때 표암 암각화는 아들을 낳고자 한 만월부인의 흔적으로 볼 수 있다고 했다.
김희동 기자press8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