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 올라보면 안다. 울울창창한 숲, 나무와 나무사이 길이 나 있고 그 안에 깃든 바람과 햇살, 새와 짐승들, 온갖 이야기들이 신화처럼 펼쳐진다. 신라인들에게 수미산(須彌山)으로 여겨진 경주 낭산이 새롭게 조명된다.    낭산은 남북으로 길게 누에고치처럼 누워 양쪽에 각각 봉우리를 이루고 있으며 산허리는 잘록하며 높이는 108m로 그다지 높지 않은 부드러운 능선을 이루고 있다.    낭산자락에는 거문고의 명인 백결 선생이 살았으며 문창후 최치원 선생이 공부하던 독서당도 있다. 남쪽 능선에는 선덕여왕의 능이 있고 그 아래쪽에는 호국 사찰로 알려진 신라 향가의 현장 사천왕사터가 있다.    동북쪽에는 황복사터와 삼층석탑이 있으며 서쪽 중턱에는 낭산 마애삼존불이 있다. 그 주변에 문무왕의 화장터로 여겨지는 능지탑 등이 남아있어 예로부터 서라벌의 진산으로 불리며 신성스러운 산으로 여겨졌다.     ■ 낭산, 도리천 가는 길  국립경주박물관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재)성림문화재연구원과 함께 15일부터 9월 12일까지 국립경주박물관 특별전시관에서 `낭산, 도리천 가는 길` 특별전을 공동 개최한다. 신라 도리천, 경주 낭산 문화유산을 처음으로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어 특별한 의미가 있다.    특별전시장 802㎡(243평)에 전(傳) 황복사터 삼층석탑 출토 사리 장엄구 중 389점을 전시했다. 조도를 낮춘 전시장 동선은 최근 트랜드를 방영한 전시를 적극 활용했다. 관람 포인트로 영지 스님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녹유신장상 벽전` 일부분만 남은 유물 위로 신장상 형상을 맵핑 투사해서 생동감을 줬다.    또 유물전시관 벽면을 이용해 녹음이 가장 짙은 5~6월의 낭산 신유림을 촬영한 영상을 편안하게 앉아서 감상할 수 있게 해 새소리와 함께 힐링의 공간도 제공하고 있다.     최선주 경주박물관 관장은 "이번 특별전은 그동안 사람들의 주목을 크게 받지 못했던 경주 낭산과 그 문화유산의 역사성을 조명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라며 "이번 전시를 통해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경주 낭산의 문화유산과 그 역사 속 이야기들이 국민들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이번 특별전은 신라인들이 각별하게 여긴 경주 `낭산`에 대해 소개하고 나아가 낭산에 분포한 다양한 문화유산을 알리며 이것들이 가지는 의미를 종합적으로 조명하기 위해 5개의 주제로 구성했다.    전시 해설을 맡은 이현태 학예연구사는 "경주 낭산은 이리가 엎드린 형상이어서 `이리 낭(狼)`자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마천은 `사기(史記)`에서 동쪽의 큰별을 낭으로 부른다고 했는데 이리 형상때문이 아니라 신라 왕궁의 동(남)쪽에 자리한 까닭에 낭산으로 불렸을 가능성이 크다"라며 "낭산은 신라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산 이름의 유래조차 명확하지 않을 만큼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번 전시가 신라인들의 신성하게 여겼던 낭산을 이해하는 디딤돌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 낭산으로의 초대  경주 분지에서 낭산의 위치와 낭산에 분포한 문화유산을 소개하는 공간으로 구성했다. 경주시 보문동에 있는 신라 유적 지구로 실성왕 12년(413)부터 `신유림(神遊林)`이라 불리며 성스러운 산으로 여겨졌다. 경주 선덕 여왕릉, 경주 사천왕사지, 능지탑, 마애불, 경주 황복사지 삼층 석탑 등이 있다. △ 신들이 노닐던 세계    사천왕사와 전(傳) 황복사 등 낭산의 사찰에서 다양한 신장상(神將像)이 만들어진 배경을 소개한다. 신장상은 사찰이나 부처를 수호하기 위해 갑옷을 입고 칼이나 창을 들어 무장한 조각상이다. 토착 신앙의 성지였던 낭산이 신장상의 조성 등을 통해 불교라는 새로운 사상의 공간으로 변하긴 했지만 신성한 공간이라는 인식과 국가를 지켜준다는 상징성만큼은 변함없이 이어진 배경을 담았다. △ 왕들이 잠든 세상  진평왕릉과 선덕여왕릉이 낭산 일원에 들어서면서 낭산 일대가 신라 왕들의 영원한 안식처로 자리매김했고 그 과정에서 왕의 명복을 비는 사찰이 건립됐음을 소개한다. 1942년 전 황복사 삼층석탑에서 수습된 사리 장엄구는 이러한 양상을 잘 보여주는데 국보로 지정된 금제 불상 2구를 비롯한 사리 장엄구가 세상에 나온 지 80년 만에 처음으로 일괄 전시돼 이번 특별전의 의미를 더한다. △ 소망과 포용의 공간  낭산이 국가와 왕실의 안녕뿐만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개인의 소망을 기원하던 공간으로 성격이 확장됐음을 소개한다. 이를 위해 국립경주박물관과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이 소장한 능지탑 발굴품을 한 자리에 선보인다. 능지탑의 원형을 짐작케 하는 벽전과 상륜부 장식도 처음으로 대중에게 공개한다. 벽전은 벽면이나 기단 면을 장식하는 전돌이다. 아울러 일제강점기에 낭산 서쪽 자락에서 발견됐다가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진 십일면관음보살상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진 약사불 좌상이 처음으로 함께 전시되는데 현실의 어려움에서 벗어나고자 기도하던 신라인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 전시를 마치며  사역(寺域)의 대부분이 발굴됐음에도 불구하고 사찰의 명칭조차 해결되지 않고 있는 전 황복사의 사례를 소개하며 낭산의 문화유산에 대한 꾸준한 관심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한편 경주에서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밝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국립경주박물관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재)성림문화재연구원이 힘을 합쳐 공동으로 전시를 개최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 `낭산` 관련 설화 및 배경  `삼국유사`에는 경주 낭산과 관련해 흥미로운 내용이 실려 있다. 신라 제27대 왕인 선덕여왕이 "내가 죽거든 도리천에 묻어달라"고 유언하자 신하들은 그곳이 어디인지 몰라 당황했고 선덕여왕은 `낭산의 남쪽`이라고 일러줬다. 불경에는 사천왕천(四天王天)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했고 문무왕 19년(679) 낭산 기슭에 사천왕사가 세워지자 신라인들은 그제야 선덕여왕의 신령하고 성스러움을 알게 됐다고 한다.    신라인들에게 수미산으로 여겨진 경주 낭산은 토착 신앙의 성지였다. 사천왕사가 세워진 곳은 원래 신들이 노니는 숲인 `신유림(神遊林)`이 있었다.    413년 누각 형태의 구름이 낭산에서 일어났고 향기가 가득 퍼져 없어지지 않자 당시 실성 이사금은 "이는 반드시 신선이 내려와 노니는 것이니 응당 이곳은 복스러운 땅"이라며 낭산에서 나무 베는 것조차 금할 정도였다.    이러한 신령스러움 때문에 낭산은 중요한 제장(祭場)으로 사용됐으며 신라의 중요한 명산대천가운데 으뜸인 삼산(三山)의 하나로 대사(大祀)가 거행되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낭산은 사천왕사와 망덕사, 전 황복사 등 불교 유적이 강조되면서 토착 신앙 및 신라의 국가 제장으로서의 면모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김희동 기자press8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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