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미처 알지 못한 무명들의 반란. 동서고금을 섭렵한 고수의 고독한 삶에서 구도자의 모습이 투영된다.경상투데이가 재야에 묻혀 은둔의 자세로 자신들의 분야에서 탁월함을 드러내지 않고 외길 인생을 걷고 있는 고수들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원로 군사학자인 이종학 박사(서라벌군사연구소장·93)를 새해 인사 겸 만나뵙기를 청하면서도 추운 날씨라 걱정이 앞섰다. 미리 마당까지 나와 겨울나무 사이에 서 있는 모습을 보면서 유교 경전 중의 하나인 중용(中庸) 33장에 나오는 조리(條理)가 떠올랐다. 나뭇가지의 얽히지 않고 잘 뻗음을 조(條), 나이테의 규칙적인 새겨짐을 리(理)라 한다. 조리(條理)란 그 사람의 외양이 얽히지 않고 나뭇가지처럼 잘 뻗었다는 것이고 나이테처럼 규칙적이라는 뜻이다. 이종학 박사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나 내면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그런 사람이다. ◇6·25전쟁이 바꿔놓은 청년의 삶  520만명의 인명 피해를 낸 6·25전쟁은 대한민국의 운명뿐 아니라 청년 이종학의 삶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포항시 대흥동에서 1929년 태어난 그는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 당시 울릉도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전쟁이 났는데 한가하게 학생들을 가르칠 수 없다는 생각으로 공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공사에서 그는 매일 살상훈련을 받았다. 적을 죽여야 내가 이기고 나라를 지키는 것이다. 직업군인이 되기 위한 이러한 훈련은 어느덧 그의 몸과 정신을 쇠약하게 만들었다.  상담 끝에 그는 마산공군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당시 내과과장이었던 이봉균 중령은 인생의 고뇌와 삶의 고충을 솔직히 적은 그의 감상문을 읽고서 휴식과 안정을 배려해 줬다. 그는 이런 배려 속에 독서와 휴식을 통한 재충전을 마치고 복귀해 어렵사리 공사를 졸업했다.  공사는 그에게 졸업 후 통신장교와 교육의 임무를 맡겨 기회를 줬다. 그는 미 공군 통신학교 통신장교 과정(1957∼8년)을 이수하면서 당시 한국은 먹고살기조차 힘든 `지옥`이요, 미국은 살기 좋은 `천국`으로 생각했으나 미국도 인종차별 문제 등 여러 갈등이 존재하며 고달픈 삶도 상존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귀국 후 독학으로 `군사전략`을 연구하며 사관생도들의 교육과 연구에 몰두했다.  그런 그에게 시련이 찾아왔다. 중령이었던 그는 1973년 10월 대령 진급심사 막바지에서 좌절을 겪었고 2년 내로 제대해야만 하는 곤경에 빠졌다. 하지만 그는 국방대학원에서 `전략론` 강의를 1968년부터 해왔기에 국방대학원장 박현식 중장(육군)이 제대하고 국방대학원 교수를 제의받았다.  1974년 2월말에 제대해 3월 20일부터 출근해 보니 학생들은 선배인 2기생 대령들이었다. 인생은 `새옹지마`라는 것을 새삼 실감한 순간이었다. ◇끊임없는 저술 활동  지난해에 이어 코로나19가 극심한 가운데 이 박사는 경주시 평동의 자택에서 머무르면서 저술 활동을 펼치고 있다.  지난 2019년 충남대 군사학부 특임교수를 그만둘 때까지 국내 최고령 현직 교수를 기록한 인물이다. 일서를 포함한 40여권의 군사학 분야의 저서를 출간했고 국내외에서 발표한 주요 논문은 70여편에 이른다.  경주에 와서 `신라 삼국통일의 의의`(`국방`, 1989, 3월호)와 `문무대왕과 신라 해상세력의 발전`(`경주사학` 제11집, 동국대학교, 1992) 등 새로운 관점에서 본 논문을 발표했다.  지금은 `백선엽 대장 평전`을 집필 중이다. 그의 저술 구상은 △백선엽 장군은 과연 친일파인가? △6·25전쟁 발발과 임진강 방어전투 △대한민국 존망의 다부동 전투 △육군참모총장과 한국군 최초 4성 장군의 길 등이라고 했다.  가장 가깝게 펴낸 책이 2020년 6·25전쟁 70주년을 회고하는 `군사사학으로 본 6·25전쟁사`(충남대학교출판문화원刊, 409쪽)이다.  대부분의 주제들은 서울대학교 교수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에서부터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인생 손자병법` 특강에 이르기까지 그가 꾸준히 역설해 온 내용들을 다뤘다. 책의 결론은 `대한민국에서 전쟁을 억제하고 평화를 이룩하기 위한 지혜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군사사학`으로 6·25전쟁을 해석한 전문서적이면서도 현대의 여러 분야 지식인들이 교양서적으로 읽기 좋도록 쓰였다. 그의 군사학을 `평화의 군사학`이라 이르는 것처럼 그의 지론은 일평생 평화를 지향하고 있다. ◇평화를 지향하는 군사학의 대부  지난 2002년 충남대에서 군사학부를 개설하는데 도와달라고 연락이 왔다. 국방대학원 교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 군사학의 이론체계(1980년 10월 30일)를 세미나에서 발표함으로써 한국에서는 최초로 `군사학 이론 정립`을 시도했다.  22년 후인 2002년 `군사학`이 학문으로 인정돼 학위과정이 생겼다. 민간대학에서는 최초로 군사학 석사과정이 충남대학교에 생겼기에 2003년 신학기부터 강의가 시작됐다. 그의 나이 73세였다. 모든 지혜와 역량을 모아 또다시 교단에 헌신해 충남대 군사학부를 이끌었으며 이는 국내 일반대학 최초의 군사학부였다.  지난 2003년 다시 시작한 강의는 2019년까지 이어져 그를 한국 최초의 군사학 명예박사이자 최고령 대학교수로 이름을 올리게 했으며 2010년 국내 최초로 군사학 박사가 배출됐다.  그는 군사학의 발전과 후학의 연구를 위해 공군사관학교와 충남대학교에 부동산과 1만여권의 장서, 수억원의 장학금을 기부하기도 했다.  그가 연구하는 `군사학`은 전쟁의 본질과 성격, 무력전의 준비와 수행 및 억지(抑止)에 관한 통일된 지식의 체계로 정의(定義)하고 한 국가의 독립과 평화는 전쟁의 대비책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고 있다. 특히 그가 연구하는 군사학은 인명을 살상하기 위한 기술이 아니라 자유와 평화와 국민의 안위를 지키는 정신적 바탕을 놓아가는 토대의 학문이다.  더 나아가 그는 가치관과 철학의 부재로 스스로 전쟁 같은 생활에 매몰돼 가는 현대인들에게 가장 짜릿한 인생 후반 역전승의 책략을 알려준다.  이 박사는 현 정세에 대해 "지금 전쟁이 일어나면 `핵전쟁`이 발발해 남북은 지구상에서 공멸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평화의 군사학`의 중요성이 더욱 높아졌다"면서 "정부도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신뢰할 수 없는 북한에 대해 경계를 늦추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노부부의 경주살이  계절은 겨울 한가운데로 수도자처럼 걸어가고 있다. 고택의 담벼락 위로 날아가는 긴꼬리의 구름, 감나무에 걸린 겨울바람, 무릎을 세우고 생각에 잠긴 짧아진 겨울 햇살이 가만히 노부부의 하루를 엿보고 있다.  퇴직을 대비해 1983년 구입해 둔 고택의 당호 `풍석재(風石齋)`는 그의 호를 땄다고 한다. 풍석은 `큰 바위는 되지 못할지언정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돌`이 되고픈 염원이 담겨있다. 집 앞에는 `서라벌군사연구소`라는 명패도 달려있다.  경주는 평소 자신을 사로잡았던 신라의 삼국통일의 원동력이요 매소성전투와 기벌포해전을 수행했던 화랑도와 충효의 고장이다.    안마당에 들어서니 고택은 기세 좋은 동장군이 점령해 있다. 봄에는 마당 가득 분홍빛 꽃잔디로 어디다 발을 놓아야 할지 모를 정도로 온통 붉은 꽃밭이다. 그는 이곳에서 35년간 오전에는 연구, 오후에는 농사를 짓는 삶을 최정화 여사와 함께 이어오고 있다. 최 여사는 그의 자료를 컴퓨터로 정리하고 의견을 나누는 가장 든든한 동반자이다.  최 여사는 "봄이 오면 마당에 탁자와 의자를 놓고 제자들을 부를 거다"라며 "그때 김 기자도 꼭 찾아와 봄의 기운을 함께 나누자"라고 말했다.  아흔을 넘긴 이종학 박사와 최 여사가 함께하는 경주살이가 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의 지혜와 참된 삶의 귀감으로 삼기에 참으로 넉넉하다. 김희동 기자press8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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