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3호에 이어=별암리는 원래 마을 이름이 굴암(窟岩)이었는데 굴속에 살던 용이 등천해 그 굴이 빈 굴이 된 후로는 마을 옆에 흐르는 영강 물속에 자라 모양의 바위가 있어 `자라바위(별암-鱉岩)`라고 고쳐 불렀다고 한다.  점촌2동에는 용지마을이 있다. 옛날 이곳에 용이 살았다는 못이 있어 용지(龍池)마을이라 불렀고 날이 가물면 주민들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하며 지금은 못이 없어졌지만 `용지샘`은 남아있다.  점촌4동에는`미르실` 일명 `진곡(辰谷)`이라는 마을이 있다. 지난 1800년경 평산신씨가 이주해 개척할 당시 미르실 또는 진곡이라 불렀다.  미르의 뜻은 용을 의미하며 진(辰)자도 십이지 중 용(龍)을 의미한다. 그리고 영강구곡 제2곡인 `송정소`에는 천 년을 기다려야 용이 돼 하늘에 오른다는`이무기`가 살고 있는데 어느 날 한 청년이 송정소에서 잠수해 보니 큰 굴이 있고 거기에 눈이 꽹과리만 한 구렁이가 혀를 날름거리는 것을 보고 기겁을 해 도망쳐 나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래서인지 한때는 이곳에서 젊은이가 수영하다가 해마다 한 명씩 원인 모르게 익사하기도 했다고 한다.  마지막 들려줄 용 이야기는 `영신도령과 영신들`이다.  옛날에 `미지니` 마을에 최부자가 살고 있었는데 그 집에 얼굴이 못생기고 무식했지만 야망을 품은 성실하고 힘세기로 소문난 영신이라는 머슴이 살고 있었다.  그가 어느 여름밤 곤히 잠을 자고 있을 때 절세미인인 한 여인이 나타나 공손히 인사를 한 후에 자기의 청을 들어주면 자기도 영신 총각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기에 호기심으로 "좋습니다. 청이 무엇이오? 하니 그 여인이 말하기를 "소저는 사람이 아니고 송정소에 사는 암용인데 내 남편인 수룡과 지금까지 사이좋게 지내오던 중 얼마 전부터 이웃 요사한 암용을 만나 즐기고 소저를 싫어하니 그 암용을 죽여주시오. 내일 새벽 뒷산(돈달산)에 내려와서 놀고 있을 때 기회를 놓치지 마시고 처치하면 됩니다"하고 칼과 잿봉지를 놓고 사라졌다.  영신 총각이 깜짝 놀라 꿈을 깨어보니 머리맡에 실제로 어젯밤 꿈에서 본 칼과 잿봉지가 있는지라 신기하게 생각하고 한참을 망설이다 이내 결심하고 곧 칼과 잿봉지를 들고 뒷산에 올라가서 새벽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두 마리의 용이 내려와서 놀고 있는 것을 본 그는 어느 것이 암용인지 수용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지만 날은 밝아 오고 급한 김에 앞에서 아양을 떠는 듯한 용이 암용이라 생각하고 칼로 내리쳐 죽였다. 그리곤 잘려 나간 머리가 펄떡펄떡 뛰고 있어 목이 다시 붙을까 봐 용의 목에 재를 뿌리고 정신없이 내려왔다.  그날 밤이었다.  어젯밤 그 여인이 머리를 풀고 나타나서 하는 말이 "총각이 죽인 것은 암용이 아니고 내 남편 수룡이니 이 일을 어떻게 한단 말이오."하며 슬피 울면서 "그러나 약속은 지켜야 하지요"하고 총각에게 소원을 물으니 그는 최부자보다 더 큰 부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 여인은 영신에게 이르기를 "문종이와 지릅대(삼의 껍질을 벗긴 대)를 준비해 영신이란 글자를 쓴 깃발을 가능한 한 많이 만들어 비가 그칠 때까지 뒷산에 올라가 기다리다가 물이 빠지고 새 들판이 생기거든 깃발을 꽂아서 표시하세요. 그럼 그 땅이 총각의 땅이 됩니다"하고는 사라졌다.  그날부터 줄곧 보름 동안이나 큰비가 내려 온 천지는 물바다로 변하는 동시에 점촌에서 함창으로 흐르던 물줄기가 영신 앞으로 흐르면서 높던 뒷산이 깎여 돈짝만큼 작아졌고 그때 산의 일부가 떨어져 흐르다가 멈춘 곳이 지금 송정소 앞의 딴봉이 됐다고 한다.  그래서 영신은 암용이 시키는 대로 비가 그치자 산에서 내려와 깃발을 꽂아 표시한 후 자기 땅을 만들었으며 황폐한 들판을 부지런히 가꿔 자기 소원을 이루고 큰 부자가 됐다.  이곳 윤직동 용지(龍池)마을 뒷산, 용지산에는 이 전설을 뒷받침해 주는 `용무덤`이 아직도 남아있다.  이렇듯 옥토`영신들`은 신비로운 전설을 머금고 문경 지역 생명의 젖줄 `영강` 맑은 물을 받아들여 가을이 되면 들판 가득 황금물결 출렁이는 풍요로운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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