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민주운동이 일어난 지 꼭 64주년이다.  최근 대구MBC가 제작한 `1960 대구 민주의 봄`은 새로운 역사 자료들을 발굴해서 보도했다. 마음에 꽂힌 몇 가지 놀라운 사실이 있다.  먼저 2·28민주운동은 전국으로 퍼져나가면서 대전3·8민주의거, 이어서 마산3·15의거, 마침내 4·19혁명으로 완성이 됐다.  그래서 2·28민주운동은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화 운동이라 불린다.  지난 1960년 2월 28일 대구에서 한국 민주운동사의 전기를 마련하는 획기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야당의 선거유세를 방해하기 위해 내려진 일요일 등교지시에 항의해 대구 8개 고등학교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다.  이 위는 단순히 일요일에 강제적으로 등교지시가 내려졌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3·15선거를 앞두고 정권의 극에 달한 부정부패가 대구지역 사회의 특수한 상황과 결부됐기 때문이다.  그간 대구 2·28민주운동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주로 4월 혁명을 다루는 과정에서 조금 언급됐을 뿐 2·28 자체에 대한 논의는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2·28이 4·19의 발단이 됐고 결국 독재정권을 붕괴시킨 출발점이었다고 할 때 2·28에 대한 역사적 의의는 높게 평가받아야 한다.  최초의 민주의거였던 2·28은 대구에서 발생해 대구·경북의 민족민주운동 정신을 발현했고 8·15 해방 이후 한국 최초의 학생운동이었다.  지난 1990년 2·28민주의거기념사업회가 발족하고 2000년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가 사단법인으로 발전하며 다양한 활동을 했다. 1990년 2·28기념탑이 이전건립되고 2004년 2·28기념공원이 조성됐다. 2010년 2·28기념관 건립이 추진됐고 2·28민주운동을 민주화운동에 포함시키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 일부개정법률안이 최종 통과돼 2·28민주운동이 민주화 운동의 효시로서 공식적인 법적인 지위를 얻게 됐고 민주운동 정신을 기리고 후세에 계승하는 계기가 됐다.  당시 학생들이 결의문을 발표했다고 하는데 자료에 의하면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해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학도들의 붉은 피가 지금 이 순간에도 뛰놀고 있으며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쳐부수기 위해 이 목숨 다할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기백이며 정의감에 입각한 이성의 호소인 것이다"라고 돼 있다.  지난 1960년 2월 28일 오후 12시 55분 경북고등학교 학생부 위원장 이대우 등이 조회단에 올라 결의문을 읽자 흥분이 고조되고 격앙된 학생들은 함성을 지르고 박수를 쳤다.  반독재의 횃불은 이처럼 대구에서 처음 불타올랐다고 한다.  2·28정신과 학생운동은 고교생들이 주체이고 계획적 조직 시위의 민족운동 요건을 갖춘 학생 운동이었다. 우리 역사상 지난 1926년 6·10만세운동, 1929년 광주 학생 항일 운동에 이은 의거로 전후 학생 운동의 효시가 되기도 했다.  특히 4·19혁명의 도화선으로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으며 한일 수교 반대와 그 이후 민주화 운동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고 본다.  학생들이 부패한 정권에 들고 일어나 불의에 도전한 2·28민주학생운동은 매우 중요하다고 보며 정의사회 구현을 나선 학생들의 정신과 자세를 높이 평가하고 교훈을 삼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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