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꽃이 질 때 서리를 맞으며 가을을 알려주는 국화는 인내하는 미덕을 높이 받들었다.
건강과 장수를 상징하고 꽃을 피우는 `서리 아래 호걸`이라 했다.
동진과 송의 혼란한 교체기에 등장한 동진의 시인 도연명(365~427) 자(字)는 원량(元亮)의 전원시인으로 대표되며 기교를 부리지 않고 청담, 소박함으로 송대 시가에 큰 영향을 끼쳤다. 소동파(1037~1101)가 도연명의 인품을 높이 칭찬한 글을 볼 수 있다.
"내가 어찌 도연명에게 시문만을 좋아 하겠는가. 그 사람 됨됨이에 있어 진실로 느끼는 것이 있다".
41세에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는 심경을 담은 귀거래사(歸去來辭)의 "뜰 안 세 갈래 작은 길에 잡초가 무성하지만 소나무와 국화는 아직도 꿋꿋하도다"에서는 소나무와 국화로 도연명의 정신을 대변했다.
국화시를 통해 애국 충절을 노래한 정사초의 국화도(菊花圖)를 통해 "차라리 향기를 안고 가지 끝에서 죽을지언정 어찌 북풍에 휩쓸려 꽃잎을 떨구겠는가"라며 국화는 시대를 초월해서 오상고절(傲霜孤節)의 꽃임을 알 수 있다.
고대로부터 9월 9일 중앙절에 국화주를 마시고 시문을 짖고 국화를 감상하며 서화를 즐겼다.
도연명은 도가와 장자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으며 잡시(雜詩)에 그 삶의 철학이 담겨있다.
내 집은 잠시 머물다 가는 여관이요 나는 떠나가야 할 나그네 같구나 떠나가서 어디로 향할 것인가 남산에 본래의 집이 있다네
그는 전원문학을 개혁했으며 무위와 우주자연의 철학과 삶이 자연운행의 한 과정으로 보고 탈속한 생사관을 보인다.
바른 의지를 가지고 국화를 사랑한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은일 정신을 문인 서화가들이 동경하며 고사화를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