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60년 2월 28일 대구 지역의 8개 교 1720여명의 학생들은 자유당 정권의 부정부패와 정치권의 무능으로 무너진 국민들의 삶에 대한 학생들의 절박한 인식과 3·15선거를 앞두고 자행된 야당 부통령후보의 유세를 방해하기 위해 내려진 일요일 등교에 대해 분개했다.
학생들은 일요등교 방침이 알려진 직후부터 각 학교별 긴급회의 등을 열어 그 부당함을 지적하고 학교에 일요등교를 철회해 줄 것으로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2월 27일 오후 학생들은 모여 부당한 일요등교에 항의하기 위한 시위를 조직하기로 하고 상호 연락망을 구축하고 결의문을 작성했다.
2월 28일 낮 12시 55분 경북고 학생부위원장 이대우 등이 학교 조회단에 올라 전날 작성한 결의문을 낭독했다.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해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학도들의 붉은 피가 지금 이 순간에도 뛰놀고 있으며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쳐부수기 위해 이 목숨 다할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기백이며 정의감에 입각한 이성의 호소인 것이다".
결의문 낭독은 격앙돼 있던 학생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학생들은 자유당 정권의 불의와 부정을 규탄하며 일제히 궐기했고 교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뛰쳐나왔다.
마침내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최초의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횃불이 타오른 것이다.
서슬 퍼런 이승만 독재에 움츠렸던 대구 지역 언론은 어린 고등학생들의 용기에 힘을 얻어 `2·28대구학생의거`를 대대적으로 보도함으로써 마산, 대전, 부산, 서울 등으로 학생시위를 확산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리해 마침내 2·28의 함성은 3·15마산의거와 4·19혁명으로 이어졌고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 큰 이정표를 세우게 됐다.
당시 폭압적인 독재정권의 공포 분위기에서 학생들의 외침은 소리는 작아도 큰 울림이 됐 돌아왔다.
가장 엄혹한 시기에 가장 먼저 민주주의를 외친 2·28의 함성은 전 대한민국을 덮었다.
2·28은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의 초석으로서 학생들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지지를 받는 민주주의 실천 운동이었고 민주주의 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가게 된 발판이 됐다.
2·28민주화운동 64주년을 맞이해 대한민국의 정의와 자유를 갈망했던 학생들의 큰 용기에 감사하며 2월의 마지막 날은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 의미와 소중함에 대해 되새겨보는 뜻깊은 하루가 되기 바란다.